본문 바로가기

@ 청파 Note

[쓰임 Note] 기다림으로 증명되는 삶

20170226 쓰임교회 주일설교


기다림으로 증명되는 삶

 

<마태복음 17장 1-9절>    

 

1.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2.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3.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4.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5.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6.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다.7.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8. 그들이 눈을 들어서 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셨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Lumix gx9 / 20mm]

기다림이라는 삶의 의지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여러분, 요즘 가장 기다려지는 일이 있으십니까? 있다면 그것은 또 무엇입니까? 사실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삶을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 힘 빠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기다림’이란 언제 그것이 성취될지 혹은 맞이하게 될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고 또 그 기다림이 정말 이루어질지도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이런 ‘기다림’이라는 기대 없이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어떤 식이라도 기다림이 있다고 한다면, 삶을 살아갈 의지가 충분히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늘 눈여겨보고 계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산에서 일어난 예수와 그 일행들 이야기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산에 올라가던 중이었는지 아니면 산에 다 올라서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산 위의 어느 곳에서 예수의 모습이 갑자기 변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아마 저자 마태는 이러한 예수의 변화를 통해 예수의 신성을, 다시 말해 그가 참 하나님임을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자리에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이들은 예수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베드로와 그 일행들에게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뒤엎였습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 순간 주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야 한다!


여러분, 예수의 모습이 변모된 후, 등장한 모세와 엘리야는 무엇을 나타내기 위함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이 택하셨던 사람, 위대한 역사를 시작할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세(출 24:12-18)와 엘리야(왕상 19:8-18)는 예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인물입니다. 그들도 산에 올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분별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옛 언약인 구약의 말씀에 등장한 그들과 예수의 만남은 새로운 법이 세워지고 있음을,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남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베드로가 세 개의 초막을 짓겠다는 말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판단이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의 소유로만 두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특별한 경험을 한 이들만을 위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누릴 사람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 즉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퍼져 어느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그 강렬한 경험이 그들을 그곳에 정착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그 황홀한 경험은 흘려보내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내가 만나고 또 나와 함께 하는 이들에게까지 흘려보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은혜는 얼마가지 않을 것입니다.


마태의 예수 신격화 의도


베드로가 방금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이런 말씀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베드로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고 그 순간이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영광을 가두려고 했을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방금 이 말은 예수에게 모세, 엘리야와는 다른 위격을 부여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신격화된 예수의 신분을 공고히 하려는 마태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 음성은 베드로와 그 일행들이 예수를 새롭게 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음성을 들은 제자들은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가까이 오시더니,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그들이 눈을 들어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없었고 예수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 난 후, 예수는 산을 내려오다 그 일행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기다림,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잠잠히 머무는 것


여러분, 예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자기에 관한 어떤 특별한 경험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이야기 되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면 단숨에 사람들 사이에서 우위에 올라서게 되고 존경을 받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경험, 소수만 경험한 신비로운 일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기 보다는, 거부되어 지거나 이해되지 못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이 주관적인 경험이라는 것은 이러한 일을 경험한 소수의 사람만의 특권이 될 위험도 매우 큽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요? 예수는 그들이 목격한 오늘의 광경을 자신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또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 광경을 자신들의 가슴 속에 담아둔 채 잠잠히 기다리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때가 되면 그것에 관해 말하되, 그 때까지 뜨거웠던 그 광경을 마음에 담은 채 살아가고 있으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제가 서두에 ‘기다림’은 참 힘 빠지는 일이기도 하다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다림’은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렬하게 느끼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다림’이 수동적인 삶을 살라는 말로 이해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다리며 산다는 말은 수동적으로 삶을 살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기다림’은 어느 것보다 적극적인 삶의 태도, 즉 능동적인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저는 몇 해 전, 교회를 다니지 않는 몇몇 분께 기도한다는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몫, 해야 하는 몫을 회피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판단하고 고민해야 할 것들을 기도한다는 핑계로 책임 회피하는 것 아니냐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정말 기도가 그런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저는 이 고민을 아는 목사님과 이야기 중에 꺼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사실 기도를 한다는 건 엄청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은 자신의 마음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 멋대로 하고 싶어 하는 그 순간,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는 게 훨씬 더 어렵고 고된 일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몫을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기다림’도 ‘기도’와 마찬가지로 본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도 자신의 뜻대로 하고 싶은 것을 멈추고 잠잠히 머물 줄 아는 것과 같은 말 아닐까요? 


응축과 성장의 시간인 ‘기다림’


모든 삶에는 준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되어 지기 위해서는, 어떤 성취가 있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신비로운 경험을 일반화(절대시) 하는 것에 관한 위험성에 대해서도 염려하셨지만, 무엇보다 앞으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긴 역사를 바라보며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계셨던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기다림’은 ‘고독’이라는 말로 바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시인게게 보내는 편지>에 나온 몇 개의 대목이 ‘기다림’에 관한 의미를 더 이해하기 쉽게 만들 것입니다. 


릴케는 ‘고독’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의 고독은 당신에게 아주 낯선 상황 속에서도 당신을 위한 의지처이자 고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바로 고독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당신의 모든 길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p.47) 

 

우리는 주로 ‘고독’이 어둡고 찜찜한 그 무엇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고독’은 자신과의 대화의 시간,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고독’은 ‘기도’의 다른 표현일 수 있습니다. ‘고독’이라는 것은 어떤 응축의 시간, 성장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기다림’도 어떠한 때를 맞이하기 위한 응축과 성장의 시간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은 그 어느 교회의 절기보다 ‘기다림’을 가장 또렷하게 느낄 수 있는 절기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수동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리며 자신의 몫을 충실히 살아냅니다. 무슨 일이든 너무 조급해마시고 기다림의 시간을 즐거이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내 마음을 살피는 응축의 시간이자 성장하는 시간입니다. 매순간 잘 기다리며 내면의 든든함을 채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적절한 때에 잘 드러낼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www.youtube.com

 

728x90
728x90

'@ 청파 No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70305 주보  (0) 2017.03.11
[쓰임 Note] 있는 그대로 그 분 앞에  (0) 2017.03.05
20170226 주보  (0) 2017.02.25
[쓰임 Note]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방식  (0) 2017.02.20
20170219 주보  (0) 2017.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