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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일상에 성찬을 마련하라

20170430 쓰임교회 주일설교

 

일상에 성찬을 마련하라

 

<누가복음 24장 14-35절>

 

14. 그들은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15.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당신들이 걸으면서 서로 주고 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18. 그 때에 그들 가운데 하나인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무슨 일입니까?"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22. 우리 가운데서 몇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24.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26.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27.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28. 그 두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는 척하셨다. 

29.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 

30.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31.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34. 모두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래서 그 두 사람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를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다.

 

 

거리를 두고 보는 연습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지금 온 교회는 부활 이후의 절기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사회는 대통령 선거에 온통 이목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요즘 여러분들의 관심은 어디에 가장 많이 가 있습니까? 아니면 가족의 일에 온통 생각이 가 계십니까? 아니면 어떤 개인적인 특별한 감정에 관심이 가 있으십니까? 뭐든 좋습니다. 다만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거리를 두고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문제를 잘 해결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좀 벗어난 자리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 유명한 찰리 채플린(1889-1977)의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보면 희극이라는 말말입니다. 이 말은 이런 거겠죠. 내가 전전긍긍하며 매달리는 문제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로 보았을 때 그것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 또는 시간이 흘러 그 문제를 되돌아봤을 때 내가 그렇게까지 에너지를 쏟아 부을 필요가 있었나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모든 일에 거리를 두고 볼 줄 알아야합니다. 나무보다는 숲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인위적인 시도가 필요한 법

 

이 원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적용됩니다. 물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과 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 주님과 거리를 두고 지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평범한 일상에 어떤 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하나님을 기억하는 어떤 시도나 장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에덴으로부터 추방된 이후 이 땅을 살아가며 인위적인 존재가 되었다면, 그 흐름을 끊어내는 인위적인 시도 또한 필요한 법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특별한 계기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하게 되기도 하지만 어떤 일이 갑작스럽게 닥쳤을 때 덜 당황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글로바 부부와 만난 부활 예수 

 

오늘 본문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 나서의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의 이야기를 포함해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글로바라고 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요한복음에 쓰여 있는 동일한 내용에 근거해 다른 한 사람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두 사람 곁에 다가오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예수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은 예수는 그들에게 서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글로바는 어의가 없다는 듯 예수를 향해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당신만 모르냐며 타박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무슨 일이냐며 모른 척 묻습니다.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 있었던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 행동과 말에 있어 힘 있는 예언자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은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 여겨 소망을 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있고 사흘이 지났는데 그의 무덤에서 시신이 사라졌고 무덤에 갔던 이들이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천사는 예수가 살아났다고 말했고 본인들도 무덤을 가보니 비어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잠잠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예수는 예언자들이 이미 말했던 것들을 믿지 못했냐며 안타까운 마음에 그들을 꾸짖습니다. 예언자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 나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냐며 이야기를 덧붙이십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성경 전체에 쓰인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난해한 본문과 씨름하기

 

글로바와 그의 아내 마리아는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동일한 곳에 머물지 않고 더 가려했으나 그들이 만류하여 글로바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그곳에서 묵게 된 예수는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 할 때에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이것을 받아먹은 글로바와 그의 아내는 갑자기 눈이 열려 그들과 함께 있는 이가 예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신비로운 장면처럼 예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길에서 자신들과 함께 걷고 또 성경을 풀이해주신 분이 예수였음을 역으로 상기하며 당시 그 이야기를 듣던 자신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을 서로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께서도 모두 잘 아시다시피, 오늘 본문에는 신비한 일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부활한 예수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있으면서도 옆에 다가온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나 또 축사하신 빵을 나누고 나서야 그가 예수임을 알아봤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상징적인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정답은 아니어도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해 오늘 본문과 씨름해 봐야 합니다. 

 

내가 믿는 주님은 누구입니까

 

먼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걷고 있는 데도 그들 곁에 있는 이가 예수임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실 글로바에 관해서는 복음서에 간혹 이름만 등장할 뿐 어떤 인물인지 전혀 설명이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좀 더 머리를 굴려 봐야합니다. 글로바와 그의 아내는 어떤 사람이었고 왜 그 부부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는지를 말입니다. 사실 어쩌면 글로바와 그의 아내는 그동안 예수의 관해 소문만 들었을 뿐 실제로 예수를 만난 적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여기서 만난다는 것이 꼭 실제로 얼굴을 마주 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의 만남은 지금 우리에게도 충분히 적용 가능합니다. 내가 믿는 주님, 내가 믿고 있다고 여겨지는 그 주님은 내가 직접 경험한 주님입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믿고 있는 주님 다시 말해 누군가가 전해주는 그 주님입니까? 이 질문을 받아들이는 것은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믿는 주님이 공허한 존재일지도 모르기 때문이고 또 내가 믿는 주님이 굉장히 편협한 존재였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은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오해하는 것은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심하거나 오해하는 것은 무언가를 향한 ‘의지’가 담겨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가장 큰 죄는 굳어져버리는 것입니다. 여백이 없는 믿음은 불신앙이나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믿는 주님이 공허한 존재가 아니고 또 내가 믿는 주님이 편협한 존재가 되지 않고 굳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또 들어야 합니다. 편견 없이, 마음의 장벽 없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또 자신의 견해를 나눠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 인습적 혹은 관습적으로 믿어오던 주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나와 함께하고 계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난 주님은 나와 타자의 깊은 이해 속에 생동감 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일상에 성찬을 마련하라

 

오늘 본문을 통해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글로바 부부는 그들과 함께 있는 이가 예수인지 알아볼 수 있게 되었나?’ 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식사하려고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을 때 그들의 눈이 열려 그가 예수인지 알아보게 됐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그것을 나누는 그 행위에 무엇이 담겼던 것일까요? 

 

예수를 알아본 글로바 부부는 예수와 함께 걸었을 때 그로부터 들었던 말씀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던 것을 상기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자기 인식에 이르게 된 것은 분명히 예수를 알아본 시점인 식사할 때입니다. 그런데 예수와 그들이 식사를 하는 장면을 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한 가지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바로 ‘성찬’입니다. 우리는 성찬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누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의 생명과 그의 죽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물론 지금의 우리는 예배 가운데 성찬식을 합니다. 특별히 구별된 그 시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분이나 나이, 성별 등과 같이 태생적이나 사회적인 조건 없이 주님의 사랑이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24시간 성찬을 행할 수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찬의 개념을 우리의 일상에 가져오면 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상기시킬 수 있는 시간과 또 그분을 초대하는 공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물론 구체적인 ‘시간’을 구별해 기도를 하고 또 그렇게 기도하고 묵상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넓혀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떠올리게 하는 일상의 ‘틈’ 다시 말해 일상에 함몰되지 않기 위한 ‘거리 두기’가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과 공간 만드는 것 외에 잠들기 전 하루를 돌아본다던가, 어떤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손에 쥐고 있는 십자가를 통해 마음을 가다듬는다던가, 짧은 글이라도 써 본다던가, 동네를 좀 걸어본다던가, 독서를 한다던가, 무엇인가 만들거나 그려본다는 것 등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일상에 틈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렇게 마련한 틈과 거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초대하고 또 그분의 마음에 접속해야 합니다. 주님을 기억하려는 장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 질 때까지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요즘 우리의 관심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그리고 혹시 우리는 교회 밖을 나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건 또 아닙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따르는 예수는 내 삶 가까이 체험되는 그런 존재입니까? 아니면 그저 예루살렘에 소문만 무성한 그 예수를 나는 믿고 있습니까? 나와 늘 함께 하시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을 잘 느끼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거리두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곧 아주 가까운 내 일상에 성찬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부담스러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주님 앞에 강박적으로 얽매여 살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정말 자유로운 존재로 이 땅을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 곁에 주님이 가까이 계시면 계실수록 우리는 참 자유로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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