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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에세이] 신은 낙원에 머물고 있지 않다

 

추수감사절이 지나고 몇 주가 흘렀다. 적어도 감사의 표현은 사골처럼 우러날 줄 알아야 그 말의 본질이 흐려지지 않을 텐데 교회 내 감사의 자동판매기식 요구에 우리의 내면은 자주 사골의 앙상한 뼈만 드러내 왔다. 

 

가톨릭 일꾼 금요 세미나에서 엘리자베스 A. 존슨의 책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를 중심으로 강의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첫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며 아버지께 전화 한 통을 드린다. 간단한 안부를 묻고 무얼 하고 계시냐는 물음에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뉴스를 보신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너도 내일 데모(집회)에 나가냐고 묻기에 3차 집회부터 꾸준히 나가고 있고 내일도 당연히 나갈 거라고 말씀 드렸다. 순간 “어서 끌어 내려야죠.”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툭 튀어 나왔고, 이 말을 들은 아버지께서는 그런다고 그 사람 안 내려온다며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하신다. 

 

나 스스로 너무 잘난 척 하는 것 같아 “아버지가 힘 좀 써 주세요.”라며 권한을 토스해 드렸더니 웬걸 조만간 어머니와 함께 해외로 도피하실 거라 하신다. 자식들에게 장소도 비밀로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난 한술 더 떠 뉴질랜드나 호주에 가서 살면 참 좋을 거라 말씀 드렸더니 웃으시며 어머니를 바꿔주신다. 새누리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동네인 강원도 동해 양반이 이번 일로 정치에 관한 기대는 물론이거니와 집권 여당에 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진 모양이다. 

 

전화의 바통을 이어 받은 어머니는 여당이나 야당이나 하는 짓이 똑같다며 약간 격양된 목소리시다. 정치에 특별한 관심이 없으셨던 어머니의 전문가적(!)인 발언에 적잖게 당황했다. 농담 삼아 어머니가 민주당 추미애 대표 자리를 대신 하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대체 왜 그러냐며 한 숨 쉬시기에 “좋네, 그 정도의 날카로움이면 정의당 심상정 대표를 대신해도 되겠소.”했더니 웃으신다. 거기서 끝났으면 참 좋았으련만, 동해의 중심가에서도 매주 촛불집회가 있는 모양이니 아버지와 손잡고 다녀오라 했더니 나라를 위해 기도만 하겠다고 하신다. 간절한 기도의 응답은 행동이 따라오기 마련이고 믿음의 깊이는 현장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간곡히 말씀 드렸더니 너나 잘하라고 하신다. 순간 정곡을 찔린 것 같아 멍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예수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앞으로 찬찬히 살펴보라고 알려드렸다. 

 

추수감사절이 지나고 대림절을 맞은 이 때에 가슴 깊이 ‘감사’하게 된 것은 청와대에 계신 분 덕분이다. 그분의 영향력으로 기호 1번만을 뽑으셨던 아버지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던 어머니가 달라지셨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가치관과 정서의 변화는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전화를 끊고 홍대 밤거리를 걷는 데 괜히 청와대 계신 그분께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자베스 A. 존슨은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연역적이고 추상적인 이해가 아니라, 투쟁하고 희망하는 그들의 온전한 일상체험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만난다는 점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발견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은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다. (생략) 어떤 시대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통찰이 꽃피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p29-30).” 

 

오늘이면 6차 촛불집회가 열릴 것이다. 지금 이 때가, 지금 이 시기가 ‘정의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분의 뜻을 살아낼 가장 좋을 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관념을 구체화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때이다. 신은 결코 낙원에 머물고 있지 않다.

 

 

이작가야의 아틀리에

이작가야의 아틀리에(Atelier)입니다. Lee's Atel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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