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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에세이] 자유로운 존재, 인간

 

청소년 시절 교회에서 문학의 밤을 할 때가 생각난다. 지금도 기억하는 극 중 대사 하나가 있는데 니체의 "신은 죽었다"가 바로 그것이다. 친구의 대사를 듣고 불안감에 사로 잡힌 나는 그 때부터 니체를 내 인생의 경계대상 1호로 삼았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직 니체의 책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그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책을 곁눈질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일행들은 하나같이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그려냈다. 동기에게 니체 이름을 꺼냈더니 이름만 듣고서도 기독교에서 아주 불온한 인물이라는 반응을 했다. 친구의 말도 맞는게 니체와 그 일행들이 하는 말은 기독교의 교리와 많은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일으켜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게 사실일까, 궁금해 졌다.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인식하는 그들과 성서가 말하는 구원은 정말 지향점이 다른걸까. 니체의 영향을 받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인간을 일러 ‘신을 통해 구원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불온해 보일 수 밖에. 

 

오늘 선택의 기로 앞에서 고민하고 염려하는 동생들을 만났다. 그들은 가보지 않은 미래의 삶 앞에 당도해 있었다. 그들은 또 하나의 나였다. 카잔차키스의 책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두목은 번데기에서 나오려고 버둥거리는 나비를 돕고자 따스한 입김을 불어 준다. 정해진 시간보다 빨리 번데기에서 탈출한 나비는 날개를 펼칠 힘을 기르지 못해 필사적으로 몸을 떨다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를 슬픈 눈으로 지켜본 두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번데기에서 나오는 과정은 참을성 있게 이루어져야 했고, 날개를 펴는 과정은 햇빛을 받으며 서서히 진행되어야 했다.’ 이 독백은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살아갈 삶을 위해 고군 분투하는 이들을 향한 충고이자 격려로 보였다. 이러한 이야기들에 담긴 소소한 삶의 지혜가 어찌 신의 숨결로 이끌지 않겠는가.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모든 추상적인 관념에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살아 있는 하나의 육체를 부여’한 존재로 표현했다. 그는 생각에 몸을 입힌 존재였다. 생각과 관념에만 사로 잡힌 두목을 향해 조르바는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모른다.’고 말한다. 삶의 진리를 찾아가는 이 안내자의 말이 과연 예수가 말한 새로운 율법의 언어와 무엇이 다를까 생각해 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문학은 니체, 카잔차키스, 헤세 등을 통해 삶의 열정을 읽어낸다. 자유하게 하는 진리를 알려준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자유롭다 하여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은 그것이 갇혀 진 사고 안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신의 뜻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사유로 성서 안과 밖을 어루만질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아몬드 나무에게 신이 무엇이냐고 묻자 아몬드 나무가 대답 대신 꽃을 피워냈던 것처럼 누군가 우리에게 신(하느님)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말없이 그들 앞에 꽃 하나 피워낼 줄 안다면 잘 살고 있는 인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작가야의 아틀리에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아틀리에(Atelier)입니다. Lee's Atel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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