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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에세이] 존재의 상실 '자살'

 

쏟아지는 정보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기사 하나가 보였습니다. 오늘 새벽, 서울대학교 학생이 유서를 남기고 투신 했다는 기사였습니다. 

 

거대한 존재의 상실을 두고 그저 슬퍼하는 것 외에 어떤 말도 무가치하겠지만, 책의 저자(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가 '자살'에 대해 말했던 것이 제 마음에 공명을 일으켜 작은 글을 남겨봅니다.

 

먼저 이 글을 남기기에 앞서, 이미 무뎌질대로 많이 무뎌져 있는 제 마음을 봅니다. 우리 모두의 먼 이웃인, 타자의 죽음 소식을 그저 하나의 '기사'정도로만 느끼고 있는 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제 참석했던 포럼에서 한 어머니가 본인이 세월호의 거대한 사건 앞에 슬퍼하고 있을 때, 자신의 아들은 당장 내일 해야 할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게 현재 우리 삶의 모습인 거 같다며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만 19세였던 서울대 청년의 죽음 앞에 나는 얼마나 슬퍼하고 안타까워했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힘든 일 때문에 '죽고 싶다'고 말하는 이에게 죽을 용기로 열심히 살아보라고 말하곤 합니다. 유작가는 이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삶이 더 견디기 힘들어서, 계속해서 살아야 할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숱하게 많다. 그럴 때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걸로 살아볼 일이지!' 그러나 자살을 용기로만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삶도 용기만 있다고 해서 마냥 잘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사는 데도 죽는 데도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p82-83)"

 

그 서울대생은 유서에 이렇게 남겼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으로 괴로워할 때는 근거 없이 '다 잘 될 거야' 식의 위로는 오히려 독이다."

 

자살을 감행한 이는 이미 용기의 차원을 넘어 또 다른 고통의 차원에 머물렀는지도 모릅니다. "자살은 단순한 충동의 표출이 아니다. 누구도 가벼운 마음으로 자살하지 않는다. 겉보기에 마치 한 순간의 분노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음이 직접 동반하는 것보다 더 혹심한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겪은 끝에 자살을 감행한다(p85)."

 

우리의 위로는 상대의 존재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허무한 메아리일 때가 많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섯 가운데 하나가 1년에 한 번쯤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60대는 넷 중 하나, 70세가 넘은 노인들은 셋 중 하나가 그렇다. 생각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자살을 생각한 사람의 다섯 가운데 하나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은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철학적 실존적 선택이다. 특별히 못나서 자살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p83)."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카뮈는 물었다고 합니다. 유작가는 그냥 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는 이유가 무엇이던 간에 산다는 것은 고귀한 행위일 것입니다.

 

 

그의 유서 한 부분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정신적 귀족이 되고 싶었지만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수저 색깔이었다." 이 한 마디만 보아도 그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 이상의 것이란 느낌을 줍니다. 그의 죽음은 이 시대와 이 사회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쉽고 아쉽고 정말 안타깝습니다. '정신적 귀족'을 꿈꿨던 그의 소원을 생각할 수록 귀한 친구를 잃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번 주는 대림절 마지막 주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면 성탄절입니다. 2015년 한해를 마무리하는 이 때에 예수의 오심 혹은 다시 오심이 이 땅에 또 우리에게 그리고 교회에 주는 의미가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작가야의 이중생활

안녕하세요! 책과 여행을 사랑하는 이작가야입니다. 책과 여행에 관한 소식을 전합니다. 언제나, 누구든 편하게 머물다 가시길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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