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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문정포도나무 Note / 주일설교] 생명에 이르는 길

20190519 문정 포도나무교회 주일설교

생명에 이르는 길

<사도행전 11장 1-18절>

1. 사도들과 유대에 있는 신도들이,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2.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3.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 하고 그를 나무랐다.
4. 이에 베드로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을 차례대로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5.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나는 황홀경 가운데서 환상을 보았는데, 큰 보자기와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가 끈에 매달려서 하늘에서 드리워져 내려서 내 앞에까지 왔습니다.
6.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땅 위의 네 발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있었습니다.
7. 그리고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왔습니다.
8. 그래서 나는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된 것이나, 정결하지 않은 것을 먹은 일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9.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하는 음성이 두 번째로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10. 이런 일이 세 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서 모든 것은 다시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11. 바로 그 때에 사람들 셋이 우리가 묵고 있는 집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가이사랴에서 내게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12. 성령이 내게,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우리는 그 사람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13. 그 사람은, 자기가 천사를 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었습니다. 곧 천사가 그의 집에 와서 서더니, 그에게 말하기를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고도 하는 시몬을 불러오너라.
14. 그가 네게 너와 네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말씀을 일러줄 것이다' 하더라는 것입니다.
15. 내가 말을 하기 시작하니, 성령이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시던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16. 그 때에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1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18.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 하고 말하였다.

어떤 삶의 기준들을 세울 것인가

여러분, 혹시 여행 좋아하십니까? 최근에 다녀오신 여행지가 어딥니까? 한번 머릿속에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여행의 목적은 다양하겠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여행 계획을 짤 때, 익숙한 곳부터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여기서 익숙하다고 하는 것은 한번 쯤 가봤던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 가봤는데 좋았다고 하거나 또는 방송이나 인터넷을 보다가 좋아 보이게 된 곳을 말합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곳’으로 여행하기를 꺼려합니다. 혹시 이곳에 낯설고, 여행 책자에도 잘 나오지 않는 곳으로 여행하는 분이 계신다면, 그분은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면 그분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임에 훨씬 익숙한 사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느끼고 경험하는 것은 익숙하고 편한 곳으로만 여행하는 분들이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가 왜 설교 서두부터 여행 이야기를 드렸냐면, 우리는 ‘새로운 것’ 혹은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매우 어려워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물론 아무런 ‘기준’도 없이 사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않더라도, 삶을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어떤 기준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는 살아가며 어떤 기준이나 원리, 원칙을 갖는 걸 피할 순 없지만, 과연 우리는 우리 삶에서 어떤 원리나 원칙을 가지면 좋을지 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갖는 ‘삶의 기준’ 혹은 그리스도인이 갖는 ‘신앙의 원칙들’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나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더 풍요롭게 될지 혹은 아닐지가 결정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인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신앙 공동체는 과연 어떤 고민과 어떤 삶의 변화를 겪게 되었는지 그 힌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갈등은 피할 수 없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할이 강조되는 성경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을 믿는 이들 가운데 일어나게 되고 이를 경험한 사람들은 어떠한 변화들을 겪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오순절 함께 모여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성령이 임했고, 그로 인해 나뉘었던 자신들의 ‘출신 지역의 경계’가 허물어지게 되었고 또 자신의 소유를 공동의 소유물로 돌리기도 하는 등 ‘모이는 것’과 ‘교제하기’를 즐겨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사람이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갈등’입니다. 사실 우리는 갈등을 겪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 왜냐면 ‘갈등’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갈등의 상황’을 참 싫어하는데, 갈등의 순간이 오면 그 상황을 어서 회피하고 싶은 생각부터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내 뜻과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갈등을 겪는 순간은 오기 마련인데, 저는 요즘 누군가와 갈등을 겪게 되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 우리의 관계가 더 깊어지기 위한 과정에 들어섰구나.”라는 생각 말입니다. 

어쨌든 개인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갈등’은 피할 수 없는 법인데,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이러한 부딪침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교회’는 ‘하나님의 평화’를 추구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람들 간의 ‘갈등의 집합소’이기도 한 것입니다. 

질타를 받는 베드로

<사도행전>이 쓰였던 시대와 그 당시 신앙 공동체에도 성도들 간의 갈등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의 여러 부분 가운데, 우리 삶에 있어 아주 중요한 ‘신앙의 지침’이 담겨 있는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있기 전, 베드로는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와 만남을 갖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난 바로 그곳에 성령이 임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그 누구라도, ‘유대 사람’, ‘이방 사람’ 가릴 것 없이, 동일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일로 인해 베드로는 몇몇 사도와 유대 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받게 되는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바로 그때의 장면입니다. 

욥바에 있던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를 기다리던 ‘유대인’ 즉,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인 그 ‘할례 받은 사람들’이 갑자기 그를 나무라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공격적으로 베드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 

그러자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는 덩달아 흥분하거나 당황해하지 않고,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그들을 응대합니다. 저는 여기서 ‘성령의 역할’ 한 가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역할

여러분, 우리가 흥분하거나 화를 낼 때는 주로 언제입니까? 여러 다양한 경우가 있을 수 있겠지만, 많은 경우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 때, 우리는 흥분하거나 화를 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럴 때 가장 먼저 반응하는 우리의 신체는 바로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의 목소리는 저절로 높아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던가요? 우리는 공감 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 혹은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느낄 때 화를 내거나 흥분하곤 합니다. 

사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오늘 베드로가 처한 상황도, 지금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상황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사도’와 ‘유대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과 어울린 그의 믿음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충분히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흥분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차분히 그들의 의심에 응대합니다. ‘성령’은 바로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 불안감을 낮추고, 마음에 잔잔한 확신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환상에서 본 이야기

어쨌든 베드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차례대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욥바’ 즉, 예루살렘 북서쪽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도하던 가운데, 갑자기 황홀경에 빠지게 되고, 어떤 환상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보자기 같은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보자기의 네 귀퉁이에는 끈이 달려 있었는데, 그것이 천천히 내려오더니 베드로 앞에 멈춰 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보자기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습니까? ‘네 발 달린 짐승들’과 ‘들짐승들’,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었습니다. 이 네 종류의 동물들을 듣고 있자 하니, 우리의 머릿속을 스치는 성경이 떠오릅니다. 바로 <레위기> 11장에 등장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관한 소개가 바로 그것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어선 안 되는 음식에 관한 규례가 등장합니다. 구약의 말씀에 능통했던 베드로는, 환상 중에 본 그 짐승들이 율법에 기록된 ‘부정한 동물들’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거절한 베드로

그런데 바로 그때, 보자기에 담긴 짐승들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뭐라고 답합니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된 것이나, 정결하지 않은 것을 먹은 일이 없습니다” 그는 이 환상이 하나님의 시험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를 단번에 거절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두 번째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세 번 더 반복되더니, 모든 것이 다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베드로가 경험한 이 환상, 이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서부터 와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는 ‘증거의 구절’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담을 넘는 행위

여러분, 혹시 학창시절 때 ‘담’을 넘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월담(越牆)’ 말입니다. 사실 저는 그 경험이 없습니다. 너무 온순하게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몇 번은 야자를 빼먹고 선생님 몰래 담장을 넘어보고 싶습니다. 왜냐면 담을 넘는 행위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담’을 넘는 행위도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많이 닮은 행위입니다. ‘담’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어려운 말로, ‘자기 인식의 테두리’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담’이 높을수록 자기 색깔이 뚜렷한 사람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좋은 쪽으로 해석해본다면, 흔들림 없는 올곧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만, 만약 이를 그렇지 않은 경우로 해석본다면, ‘담이 높은 사람’은 곧 ‘자기 안에 갇힌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가리켜 보이는 것을 보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베드로가 본 환상은, 전통적인 이스라엘 신앙관이 해체되고, 확장된 신앙관이 들어서는 과도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찾아온 사람들

그런데 이 베드로의 ‘황홀경 사건’이 있고 난 후, 갑자기 그가 있던 집에 세 명의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저 이방 땅, ‘가이사랴’에서 온 사람들인데, 그들은 다짜고짜 베드로를 데리고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가려 했습니다. 베드로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이 사건 앞에,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 의심 없이 그들을 따라나섰습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 베드로 일행은 자신을 데려 온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한 천사가 베드로 일행을 데려온 그 사람 집에 들어왔고, 그에게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고도 하는 시몬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어 말하길 “그가 너와 네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말씀을 일러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구체적인 답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아마 이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과 ‘자신이 느낀 바’를 아주 자세히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곳엔 베드로와 늘 동행했던 성령께서, 거기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찾아오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자연스레 <복음서>의 말씀이 떠올랐고 이는 곧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까지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유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 짓는 ‘하나의 의식’이었다면, ‘예수께서 주신 성령 세례’는 그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1. 경계를 지워나가는 일

여러분! 어쩌면 오늘 본문을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 적용했을 때, 더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만 국한됐던 ‘하나님의 구원’이 그 경계를 넘어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이르게 되는 오늘의 사건은, 누군가에게는 ‘기쁨의 상징’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사역’을 확장 시켜 나갔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 그 구원 사역을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 이 길은 과연 어떤 길이며, 이 길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을까요? 

저는 이 <생명에 이르는 길>을 두 가지의 의미로 보았습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먼저 생명에 이르는 그 첫 번째 길은 ‘경계를 지워나가는 일’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분명한 역사입니다.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의 경계가 점차 지워지고, 하나님을 믿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동일한 은혜’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누가 저에게 예수께서 하신 가장 대표적인 사역이 뭐냐고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장벽’을 허무는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커다란 차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도 자세히 보고 오래 보다보면, 그렇게 큰 차이가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이 예화가 참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신영복 선생님의 책 <담론>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혹시 액션 영화나 사극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엑스트라’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즘 같은 경우, ‘외모의 차이’는 더더욱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면 ‘마동석’ 같이 개성 있게 생긴 배우들도 주연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엑스트라와 주인공의 결정적인 차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담론>에서는 말합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말’에 있다고 말입니다. 주인공은 죽을 때 말을 많이 하고 죽고, 엑스트라는 한방에 훅 갑니다. 주인공에게는 친구도 있고, 애인도 있고, 가족도 있습니다. 주인공은 죽을 때 그 사람들에게 말을 남깁니다. 혹은 자신이 전하지 못해도 다른 누군가 그의 말을 대신 전합니다. 그러나 엑스트라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그냥 죽습니다. (신영복, <담론>, 돌베개, p.251) 

하지만 처음부터 카메라가 엑스트라를 비췄다면, 그의 역할은 분명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마 관객들은 그가 엑스트라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그의 삶을 계속해서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누구든 주인공 자리에 앉히면 빛이 나기 마련입니다. 

방금 이야기에 <사도행전> 본문을 대입해 본다면, 아마 여기서 ‘주인공’은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 사람’이 될 테고, ‘엑스트라’는 그들에게 속하지 못한 ‘이방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인공’과 ‘엑스트라’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동일한 하나의 사람입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담과 하와의 후예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속 받은 은총의 사람들입니다. 

 

2. 회개를 통해 가는 길

그리고 생명에 이르는 두 번째 길은 바로 ‘회개’를 통해 가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을 보면, ‘이방 사람들’에게 열린 ‘생명의 길’은 ‘회개’를 통해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회개’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오르십니까? ‘회개’라는 말 속에 담긴 정확한 의미는 바로 ‘돌아섬’입니다. 자신이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을 때, 단호히 돌아서서 반대로 걸어가는 것이 바로 ‘회개’가 가진 참 의미입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내 입술로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도 무척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의 고백과 더불어 지난 삶에 대한 반성 그리고 그로부터 과감히 돌아서는 행위입니다. 

때로 우리의 삶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는 것은, 단호히 끊어 내야 하는 것을 계속 붙들고 있어서 일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어렸을 때 가졌던 ‘수줍음’은, 가난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부자가 된 뒤에서 사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 과감히 한발자국을 내딛지 않으면, 계속해서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는데,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으로의 변화’는 우리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이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 변화의 단초는 오직 성령께 있습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참된 회개에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경계를 지우는 일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할이 강조되는 성경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등장하는 성령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분으로 소개 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이루셨나하면, 사람들이 사는 ‘지역’과 ‘언어’를 허무셨고,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를 이웃과 나누고 또 서로 ‘모이기’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본문에는 그 일들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났는데요. ‘이방 사람들’과 어울렸다는 이유로 ‘사도와 유대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았던 베드로는, 자신이 기도하는 가운데 보았던 환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큰 보자가 같은 그릇’ 속에 제사 음식들이 담긴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율법과 관련된 것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환상’을 통해 부정한 음식들을 깨끗케 하셨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경계를 허무시고,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계심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역사가 베드로를 찾아온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다시 한 번 명확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종교는 나누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선을 없앰으로써 궁극적인 '하나'에 도달하도록 하는 데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지중유산'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산도 그 뿌리는 땅과 이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김기석,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포이에마, p.210)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자꾸만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을 나누고, 가르는 그 경계들을 자꾸 지워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하신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단호히 돌아서서 가라

그리고 우리는 잘못된 길에 들어섰을 땐, 단호히 돌아서서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외면적인 상황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의 내면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의 잘못을 정직하게 하나님께 아뢰되, 어둠의 길에서 과감히 돌아서야 합니다.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지 말고, 용감히 앞으로 나아가 지난 삶의 관성을 끊어내야 합니다. 그럴 때, 새롭게 채우시는 ‘하늘의 은총’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모든 교회는 교회력으로 <부활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부디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으로 부활하신 그 주님의 은총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의 삶과, 또 이곳에 모인 분들의 신앙의 여정 위에 늘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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