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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청년 2부] 시험 새로 보기

20220918 청파교회 청년 2부 설교

 

시험 새로 보기

 

<마태복음 4장 1-2절>

 

1.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2. 예수께서 밤낮 사십 일을 금식하시니, 시장하셨다.

 

 

변화는 언제 일어나나?

 

책의 저자인 틸리케는 젊은 시절, 신앙의 변화를 경험한다. 1908년생인 틸리케는 어릴 적 세계대전을 겪으며,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믿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말씀과 씨름했다. 특히 예수께서 받으신 광야의 시험에 관해 묵상하는데, 이 묵상이 그의 신앙의 깊이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우리는 주로 언제 변하나? 내게 변화는 주로 언제 찾아오나? 변화는 즐겁고 유쾌할 때보다 힘들고 어려울 때 겪게 된다. 성경 인물들이 좋은 예가 된다. 이삭산 제물로 바쳐질 번한 일로, 내적 변화를 겪는다. 그는 이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인해, 자기 인생을 새롭게 보게 된다.  

 

이승우 작가의 소설 <사랑이 한 일>을 보면, 성경에 감춰진 이야기들이 몇 가지 등장한다. 책을 보면, 번제 사건 이후 이삭의 상황을 상상하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 이야기들은 모두 이삭이 내적 변화를 겪고 난 후, 뭔가를 깨닫게 된 이야기들이다. 

 

이삭은 거의 반강제적으로 쫓겨난 이복형 이스마엘의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자신도 하나님 앞에 버려지는 경험을 하게 되자, 그제야 광야로 쫓겨난 형의 처지 또한 이해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그는 아버지 이삭의 마음 또한 이해하게 되는데,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침으로 하나님 앞에 사랑을 증명해야 했던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야곱도 마찬가지다. 야곱은 형의 복을 가로챔으로 형의 분노를 사게 된다. 그는 형을 피해 도망간 그 광야에서의 시간을 통해, 홈보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다. 

 

영웅들의 서사 패턴

 

성경 인물이나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을 보면, 인생에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네 단계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1) 풍족한 세계: 먼저 그들은 모든 것이 풍부한 세계에 산다. 그들은 대게 왕자나 공주 아니면 신의 가족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풍요로운 사실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2) 떠남: 그런데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험을 위하여 집을 떠나라는 부름을 받는다. 무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안온하고 평온한 일상 너머로 가보기 위해서다. 

(3) 상처 혹은 딜레마: 그리고 이 여정이나 모험에서 그들이 몰랐던 '어떤 문제들'이 발견된다. 거의 예외 없이 그들은 '상처'를 입고 커다란 딜레마에 부딪친다. 그리고 거기서 오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점점 이야기가 긴박해진다. 

(4) 변화 혹은 깨달음: 영웅들은 그 모험에서 어떤 깨달음이나 변화를 겪고, 처음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의 모습 그대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에게 줄 선물과 혜택을 지니고 돌아온다. 이것이 영웅들의 이야기가 갖는 일정한 패턴이라고 볼 수 있다. ​

 

영웅들만의 스토리는 아니다. 인간의 성장과정이 모두 이와 비슷하다. 사람이 성숙해지는 것과 신앙이 깊어지는 것은 매우 닮아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기 위해서믿던 것이 무너지고 흔들려야 다시 굳건해 질 수 있다. 그러니 흔들리는 것 때문에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기도>를 보면, 시험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이다. 많고 많은 기도 제목 가운데, 왜 이 시험에 관한 내용이 주기도문에 들어가게 됐을까? 우연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인생이 시험의 연속임을 나타내는 거라고 볼 수 있다. 

 

시험에 들었을 때의 반응: (1) 하나님을 의심 = 인간성 기억

 

우리가 시험에 들었을 때 보이는 두 가지의 반응이 있다. 시험에 든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첫 번째 반응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의심이란 말은 교회 안에서 불온한 말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잘 믿는 사람은 의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심의 과정 없이 제대로 믿기란 어려운 법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면 유명한 말이 등장한다. “사람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노력은 추구하다로도 번역이 가능한데, 뭔가를 추구하고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방황하거나 의심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심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시험이 들었을 때의 의심은 이런 건강한 의심이라기보다는, 1. 더 이상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고 2. 자꾸만 그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우리의 인간성을 기억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즉, 자신을 의지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으니, 점점 자신의 힘과 능력, 지혜와 지식을 의지하게 된다. 이것이 시험이 들었을 때의 첫 번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시험에 들었을 때의 반응: (2) 하나님의 선함 포장하기

 

시험에 들었을 때의 두 번째 반응의심과는 정반대의 반응을 하는 것이다.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신뢰뭔가 억지스러운 신뢰를 말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을 두고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의 생각을 잘 담은 말씀이 바로 이사야 55장 8-9절의 말씀이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8-9) 

 

이런 말씀은 평소에는 잘 안 떠오다가, 꼭 고난이 닥칠 때 떠오른다. 내게 이러이러한 질병이 온 것은 주님이 뜻하셨기 때문일 거야. 난 이해할 수 있어. 하나님은 정말 지혜로운 분이니까 내게 이런 게 필요했다고 여기셨을 거야 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생각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잘못된 생각인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자의적인 생각인 경우가 많다. 

 

좋은 표본인 욥기

 

그런데 이런 은혜로운 생각(?)벽에 부딪치는 순간이 온다. 언제인가? 고난의 정도가 지나칠 때이다. 그럴 때 우리는 생각한다. “이런 일을 하신 분이 정말 하나님이 맞아?”라고 생각한다. 이런 예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욥기이다. 고통의 수준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을 때, 사람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사탄의 흥미로운 제안으로 욥의 인생에 불행이 닥친다. 사탄은 믿음이 좋은 욥으로부터 재물, 하인, 자녀들을 빼앗아 간다. 처음에 욥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욥은 말한다.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욥1:21) 욥은 여전히 굳건하다. 

 

사탄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믿음이 좋은 욥에게서 재물과 자식뿐만 아니라, 욥의 살과 뼈를 쳐서 악성 종양까지 나게 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욥은 버틴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그의 믿음은 아직도 흔들림이 없다. 

 

하지만 욥의 내면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의 내면에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사실 이 싸움은 욥이 사탄을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사탄에게는 확실한 아군이 둘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시간이고, 두 번째는 고통이다. 고통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욥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자기에게 닥친 고통이 전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이자 그는 이런 생각을 한다. “혹시 나에게 닥친 고통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고통의 무의미성이 고개를 든 것이다. 

 

시간: 고통의 무의미성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참 묘한 개념이다. 양면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1) 시간은 약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이사를 가거나 이직을 하거나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모든 것이 이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별에서 오는 고통시간을 통해 어느 정도 치유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고통이 끝없이 이어질 때가 문제이다. 

(2)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면 우리는 서서히 지치게 된다. 지치는 이유는 시간이 길어져서가 아니다. 그보다 큰 고통은 이 시간들이 너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의 힘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한다. 내가 겪는 고통에 아무런 목적이 없다고 여겨질 때, 사탄은 욥에게 다가가 말한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이다. 시간의 힘 앞에 인간은 점점 1.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2. 스스로를 의지하기 시작한다. 

 

광야로 찾아온 사탄

 

개인적으로 최근에 새롭게 다가온 성경 구절이 있다. 이전에 성경을 읽을 때는 예수께서 시험을 받은 장소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말씀을 다시 살펴보니, 사탄이 예수를 찾아온 시점예수께서 홀로 광야에 있을 때였음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 우리는 뭔가 자극적인 곳에 가거나 유혹 당할만한 대상을 만났을 때, 더 시험에 들기 쉬울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를 키울 때, 위험하고 낯선 곳에 가지 못하도록 당부한다. 

 

물론 외부에서 오는 자극은 힘이 있다. 그러나 예수를 찾아 온 사탄의 이야기는 정반대의 상황을 보여준다. 사탄은 예수께서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뭔가 즐겁게 먹고 마실 때 찾아온 게 아니다. 사탄은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그것도 예수가 홀로 있을 때 찾아왔다는 게 중요하다.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롭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께서 광야에 간 것이 그의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성령에 이끌려서 갔다는 사실(마4:1)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일부러 그를 광야에 보내셨고, 예수가 홀로 있을 때 사탄을 대면하게 하셨다는 말이 된다. 

 

사실 어찌 보면, 밖에서 오는 유혹은 인간에게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같은 맥락인진 모르겠는데, 예전에 목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젊은 청년들이 찾아와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크리스천이 술을 마셔도 되나 안 되나”라는 질문이었다. (어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그때 목사님이 인용하셨던 말씀이 마태복음 15장 11절의 말씀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우리는 외부의 자극을 컨트롤하기 쉽지 않다. 외부의 자극을 줄이려면,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가 쉽지 않다. 마태복음우리가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 답이 아님을 알기에, 중요한 것은 어떤 자극을 받고, 어떤 유혹을 받는가보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다루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받은 시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밖에서 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히긴 어려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 즉 인간의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예수가 홀로 있을 때 사탄을 대면했다는 것외부적인 요인보다는 그의 마음의 결정이 더 중요함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시험의 장소: 구체적인 삶

 

우리가 예수가 받은 시험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한 가지바로 시험의 종류이다. 예수께서 시험당한 종류는 총 세 가지다. 잘 알고 있을 거다. 

1. 돌이 빵이 되는 시험 

2.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 

3. 엎드려 절을 하라는 시험이 그것이다. 

 

우리는 첫 번째 시험인 돌이 빵이 되는 이 시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탄이 예수를 향해, 돌을 빵이 되게 하라고 한 시험 예수께서 받은 시험고상하거나 고차원적인 시험이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40일 밤낮을 금식하며 굶주렸다. 나는 개인적으로 무엇을 먹느냐가 그리 중요하진 않지만, 굶는 것은 매우 힘들어 한다. 예수께서는 40일을 금식하며 굶주렸다. 40일 금식한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사탄가장 현실적인 약점을 건든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으로 유혹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어떤 신학적 논쟁이나 어떤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시험에 드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수의 성육신을 이해할 수 없다든가 또는 하나님이 만물 안에 계시는 게 맞는지 아니면 만물의 너머에 계시는 게 맞는지 등의 이유 때문에 시험이 들지는 않는다.

 

우리가 시험에 드는 경우는 주로 어떤 경우인가? 현실적인 이유가 훨씬 많다. 누군가와 겪는 갈등이나 점점 비어가는 통장이나 지갑을 보며 육신의 고통이나 질병 때문에 우리는 훨씬 시험에 잘 들지 않던가? 우리의 몸, 우리 삶의 현실 혹은 먹고사는 문제야말로 사탄이 일격을 가하기 좋은 약점 중의 약점이다. 

 

사탄을 너무 겁내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결코 얕봐서도 안 되겠다. 

 

시험의 비밀, 시험의 해법

 

그럼 우리는 무엇을 명심하면 좋을까? 세 가지로 정리가 가능하다. 

 

  1. 첫째: 우리에게 자꾸 시험에 드는 것 때문에 고민하지 말라. 왜? 왜냐면, 인간은 늘 시험에 빠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어졌다. 한평생 시험과 씨름하며 살 것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2. 둘째: 시험에 드는 요인은 외부에 있지 않다. 우리는 외적인 것을 통제할 수 없다. 결국 시험의 비밀은 우리 자신, 우리 마음과 생각에 있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3. 셋째: 용기를 내라는 것이다. 이미 시험을 받으시고, 시험을 통과하는 분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깊은 수렁에 빠지더라도 그 수렁에서 함께 견디고 있는 분이 계심을 믿으라는 것이다. 

계속된 싸움 

 

그런데 참 슬프고도 씁쓸한 사실이 있다.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후, 곧장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잠시 천사들이 마중 나와 시중을 들었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가 시험을 다 받은 후, 1. 영광스런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2. 그때부터 제대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다. 본격적인 싸움이 이제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이야기가 ‘인생이 곧 시험의 연속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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