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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2부 설교] 이제 나는 깨닫는다

20231015 청파교회 2부 설교

 

이제 나는 깨닫는다

 

<창세기 21장 15-19절>

 

15. 가죽부대에 담아 온 물이 다 떨어지니, 하갈은 아이를 덤불 아래에 뉘어 놓고서 

16. "아이가 죽어 가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하면서, 화살 한 바탕 거리만큼 떨어져서, 주저앉았다. 그 여인은 아이 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17. 하나님이 그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을 부르며 말하였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18.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하갈이 샘을 발견하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담아다가 아이에게 먹였다.

 

 

인생을 정의하는 방식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이스라엘 땅에도 주님의 평화가 속히 임하길 기도합니다.

사람의 다양한 습성 가운데에는 뭔가를 정의 내리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 교회란 이런 곳이지, 사랑은 이런 거야 등이 바로 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정의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삶의 불안을 붙잡고 싶은 욕망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을 정의하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어떤 이는 10대, 20대, 30대처럼 인생을 세대별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각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시대를 중심으로 자기 인생을 정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인생의 마디마디를 구분 짓곤 합니다. 예를 들어, 대학에 합격하거나 취직했을 때처럼, 자신이 바라던 일이 이뤄졌을 때를 중심으로 자기 인생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쉽게 말해, 자기 인생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구성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경험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 경우가 훨씬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아픔과 상처 혹은 고통과 실패의 기억을 중심으로 자기 인생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자신의 인생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구성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 간직되는 경우는 좋은 일만 가득했을 때보다는 힘들고 어려웠을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여행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다녀온 여행 가운데에 계속 회자되고 이야기하게 되는 그런 여행은 어떤 여행입니까? 좋은 숙소, 좋은 교통편, 좋은 날씨처럼 좋은 환경에서 다녀온 여행은 그 기억이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금방 잊히곤 합니다. 하지만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갖가지 환경이 열악하여 수고하고 고생했던 기억은 훨씬 오래가는 걸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사람의 고생을 꼭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사연

성경의 등장인물들을 보면, 인생에서 일어난 일들 때문에 갖가지 변화를 겪게 되는 걸 목격하게 됩니다. 조용히 살던 한 인물이 하나님을 만나서 믿음의 조상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하나님 때문에 산채로 바쳐질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부모와 집이라는 안전한 공간을 떠나서 점점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처럼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찬 저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우여곡절의 삶을 살았던 하갈의 이야기를 살펴볼까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하갈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등장합니다. 먼저 하갈의 이야기를 살펴보기에 앞서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큰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내인 사라의 태가 계속 닫혀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임이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에게도 대를 이을 수 없다는 큰 걱정거리였지만, 당사자인 사라에 비할 바는 못 되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사정을 늘 안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라가 낙심에 빠진 바로 그때에 그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라를 통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18:10). 이 소식은 정말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습니다.

사래와 하갈의 갈등

물론 지금이 예전보다 더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를 잇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중요한 일로 여겨집니다. 고대 사회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직 아브람이었던 시절, 불임의 상태였던 사래는 아브람에게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신을 대신하여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집안의 대를 이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녀의 진짜 속마음이 어떤지 전혀 드러나고 있진 않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래의 속마음은 아마도 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점점 나이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이집트 출신의 여종이었습니다(창16:1). 아브람은 사래의 말에 따라 하갈과 동침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브람과 사래는 하갈의 임신 소식을 듣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계획대로 상황이 잘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사래의 갑작스런 태도의 변화에 있었습니다. 창세기 16장 4절은 임신한 하갈이 자신의 여주인을 깔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매우 속상하고 분한 마음을 아브람에게 알립니다.

성경의 이 부분이 참 흥미롭습니다. 사래와 하갈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경은 하갈이 자신의 여주인을 깔보았다(16:4)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을 두고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의 신분이었던 하갈이 과연, 정말로 자신의 여주인을 깔보았는지 궁금해집니다. 사래는 쉽게 말해, ‘척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아닌 척, 괜찮은 척하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억압해 놓은 질투와 시기의 마음이 하갈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되자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게 된 것입니다.

상처 입은 마음은 분별을 잃게 됩니다. 사래는 보고 싶은 대로 보았고, 하갈은 사래가 보고 싶은 대로 보여-지게 됩니다. 그렇게 보고자 하면,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비참함을 느낀 사래는 자신의 왜곡된 시선을 통해 하갈을 보았습니다. 사래는 하갈의 처신과 상관없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으로부터 자신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왜곡된 사래의 시선에 기름을 붓고 맙니다. “여보,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이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길 바라오(6).” 이 말은 아내에 대한 애정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 매우 무책임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래는 아브람의 허락대로 하갈을 학대하였고, 하갈은 여주인의 괴롭힘을 못 이겨 도망치게 됩니다. 이 사건이 하갈의 첫 번째 도주 사건, 첫 번째 가출 사건입니다.

도망쳐 나온 하갈은 사막을 걷다가 샘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쉬던 가운데 자신을 찾아온 천사를 만납니다. 천사는 하갈이 받은 부당한 대우를 잘 알고 있었고, 너를 축복해 줄 터이니 다시 여주인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갈은 천사의 응원에 힘입어 다시 아브람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하갈은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 아이의 이름은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들었다(창16:11)’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날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86세였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창16:16).

아물지 않은 사라의 상처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었고, 사래는 사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아이가 생긴 것입니다. 이 아이가 바로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이에게 ‘웃음’이라는 의미에 이삭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성경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보았을 때의 나이가 백 세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창21:5).

잠깐의 해프닝은 있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만 보면, 아주 은혜롭게(?) 상황이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시 평온한 가운데, 문제가 찾아왔습니다. 이삭은 열심히 자라서 젖을 떼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이삭이 젖을 떼는 날을 기념하고자 커다란 잔치를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잔칫날에 문제가 발생하고만 것입니다.

사라가 보니,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신의 아들을 놀리고 있던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상황을 전합니다. 고자질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입니다. 그녀는 모든 상황을 이스마엘이 이삭을 업신여기는 상황으로 보았습니다. 그녀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늘 못마땅했습니다. 사라는 이삭이 태어났음에도 여전히 하갈과 그녀의 아들이 미웠습니다. 아브라함은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이삭도, 이스마엘도 모두 자신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 아브라함에게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이삭과 이스마엘 모두를 크게 사용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사라의 청을 들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13).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 하갈과 이스마엘을 빈들로 내보냅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부터 모든 이야기의 초점이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로 맞춰집니다.

하갈의 절망감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하갈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할 일을 하기 위해 장막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게 아브라함이 그녀의 장막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그는 아침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아들을 깨워서 데리고 나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나왔을 때, 아브라함의 어깨에는 약간의 먹거리와 물이 담긴 가죽 부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아무 말 없이 두 사람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에게서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평소 사람들의 신뢰를 받던 그였기에, 그녀는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은 아들의 손을 잡고,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 아브라함과 두 사람은 곧 헤어지게 됩니다.

아들과 단둘이 남은 하갈은 그렇게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걷고 또 걸었습니다. 걷는다는 의식도 하지 못한 채, 앞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하늘도, 땅도 고요했습니다. 내리쪼이는 햇살도 뜨겁고, 땅에서 반사된 열 또한 뜨거웠습니다. 목은 점점 더 타들어 갔습니다. 그 순간, 하갈의 입에서는 그동안 참아왔던 원망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녀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지상의 신음을 가장 크게 듣는다는 분께서 어찌 이토록 무섭게 침묵하시냐며 절망 가운데 외쳤습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평소 알던 사람이 갑자기 낯설어질 때를 경험하곤 합니다. 어떤 특별한 계기들을 통해서 그런 경험을 하곤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 우리가 알던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언제 그러하냐면, 내 인식의 범위를 벗어날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지 하나님은 이러실 거야, 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질 때,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을 낯설게 느끼곤 합니다.

한 영혼이 버려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철학자 보부아르는 ‘침묵도 목소리’라고 말하긴 했습니다만, 하갈은 평소 귀 기울이시고 세밀하게 반응하는 주님께서 침묵하는 모습을 보며 엄청난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절망의 순간에 찾아오신 하나님

하갈은 그 순간, 첫 번째로 도망쳐 나온 순간을 떠올렸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후회했습니다. 그때 자신을 찾아온 하나님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입니다. 자신을 찾아온 하나님의 말을 믿지 않았다면, 이 같은 절망감을 다시 느끼지 않아도 됐을 텐데,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후적인 깨달음이 그녀를 사로잡았습니다.

하갈은 이스마엘과 함께 점점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모든 희망의 끈을 놓으려는 그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놀란 듯, 그 음성은 잠들어 가는 그녀를 불러 깨웠습니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17-18) 하나님은 하갈이 절망에 빠진 그 순간에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이 경험한 다양한 역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고난, 욕망, 전쟁, 갈등, 구원과 같은 우리 삶의 다양한 이야기가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인물들은 위기를 겪지 않는 인물이 없고, 실수하지 않는 인물도 없습니다. 하갈도 실수와 위기를 계속해서 겪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절망의 순간, 하갈이 가장 밑바닥에 처해있던 순간에 찾아오셨습니다. 애써 부정하고 싶은 이야기지만,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꺾인 순간에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물에 빠진 이가 충분히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물에 빠진 이나 그를 구하고자 하는 이 모두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하갈은 힘이 모두 빠진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물을 발견하게 되었고, 다행히 엄마와 아들은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이후 그들은 다시 따뜻한 보금자리로 돌아가진 못했으나, 두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광야에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갈의 인생

하갈은 참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짧지 않은 인생에서 만남과 헤어짐, 구원과 절망의 시간을 모두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우여곡절의 삶을 살았던 하갈의 인생을 몇 개의 마디로 끊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녀는 자녀가 없던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 사이에서 아이를 낳게 됩니다. 본인의 의사가 반영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상황만 두고 본다면, 하갈에게 있어서 그리 힘든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마디입니다. 두 번째 마디는 광야에서의 시간입니다. 사라의 시기심 때문에 그녀는 두 번 보금자리에서 쫓겨납니다. 처음에는 자발적 쫓겨남이었고, 두 번째는 강제적 쫓겨남이었습니다. 하갈에게 이 두 번의 사건은 어둠의 사건이었습니다. 스스로 감내해야 할 답답하고 억울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마디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있던 하갈을 두 차례 찾아오셨고, 그녀와 아들을 절망의 늪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하갈 이야기의 결말 부를 알고 있기에 그녀가 처한 상황을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갈의 문제가 나의 문제는 아니기에 여유를 갖고 그녀의 상황을 관조하듯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이 이야기의 결말 부를 몰랐다면, 왜? 라는 질문을 쉽게 버리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그렇게 내쫓김당하게 내버려 두셨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왜 그 상황을 바라보고만 계셨는지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절망에 끝은 있는 건지 그 궁금증을 놓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우리가 살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생에는 저마다 어떤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인생을 구분 짓는 어떤 시기 말입니다. 교사들의 교사라 일컬어지는 파커 팔머(Parker J. Palmer)는 자기 앞에 기회의 문이 자꾸 닫히는 것을 경험하며 깊은 절망감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절망을 극복하며 문이 닫히던 바로 그 자리가 자신의 세계가 열리는 또 다른 자리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생의 문이 닫힐 때 그 앞에 너무 오래 서 있지 말라. 문이 닫힐 때 나머지 세상이 열린다. 닫힌 문을 두드리기를 멈추고 돌아서면, 넓은 인생이 우리 영혼 앞에 활짝 열린다.” (파커. J 파머,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홍윤주 옮김, 한문화, 2015)

지혜자의 말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일어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닐지 생각하게 됩니다(전3:11). 전도서 3장 1-8절을 보면,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돌을 흩어버릴 때가 있고, 모아들일 때가 있다.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찾아나설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다.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
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치를 때가 있고,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1-8)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난 뒤, 중요한 한마디 말로 방금의 내용을 요약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생략)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11-12) 이 말씀은 삶이 너무 무거워질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단독목회의 추억

제가 잠시 청파에 몸담고 있다가 단독목회를 하러 나갔던 때가 기억납니다. 그때가 2015년쯤이었는데, 그때 전도사들은 감리교 법상, 단독목회를 나가야 안수를 받을 수 있었고, 저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목회의 현장에 던져졌습니다. 출석 교인이 한 명도 없는 그곳에서 매 주일 예배를 드리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청파교회 목사님들과 교우님들이 오셔서 큰 위로와 응원을 건네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제 인생에 가장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청파에 계신 목사님 가운데 한 분이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끝이 없을 것 같지만, 모든 시간에는 끝이 있다.”고 말입니다. 솔직히 당시 그 말은 제게 조금의 위로와 힘도 되지 않았습니다. 꼰대 같은 말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계속될 것 같던 그 시간에 정말 끝이 왔고, 저는 다시 청파로 돌아와 새로운 목회 경험을 쌓고 있습니다.

물론 다 지났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우리가 고난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을 때는 어떤 말도 좋은 위로가 되긴 어렵습니다.

신뢰와 인내

세상에는 영원한 것도 없고, 절대적인 것도 없습니다. 역경의 시기도, 영광의 순간도 모두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삶은 유동적이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녀의 인생이 갑자기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오게 되면서, 삶에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습니다. 택함 받고, 오해를 사고, 다시 희망하고, 버려지는 순간들이 찰나에 이뤄졌습니다.

하갈은 아이가 죽어가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화살 한바탕 거리만큼 떨어져 울었습니다(21:16). 원래 ‘화살 한바탕의 거리’는 공중에 쏘아 올린 화살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리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생명을 제대로 지켜낼 수 없는 엄마의 한계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갈은 그렇게 한계에 갇혀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아마 그 울음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여러 감정과 기억들이 얽히고설켜 있었을 것입니다.

<어린왕자>의 저자 생텍 쥐페리는 그의 책 <야간 비행>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인생에 해결책이란 없어. 앞으로 나아가는 힘뿐. 그 힘을 만들어내면 해결책은 뒤따라온다네.” ​(생텍쥐페리, <야간비행>,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2018, p.103)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힘은 바로 주님을 향한 신뢰와 인내의 마음일 것입니다.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신다는 신뢰의 마음과 그리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뎌내고자 하는 인내의 마음입니다. 신뢰와 인내! 이 두 마음을 가슴에 잘 새기고 산다면, 어느새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아멘.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BibleSalon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살롱에서 나누는 말씀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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