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 Note]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2015. 7. 21. 00:31Note

20150719 쓰임교회 주일설교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에베소서 2장 11-22절>

 

11.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난날에 육신으로는 이방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뽐내는 이른바 할례자들에게 여러분은 무할례자들이라고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12.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13.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17.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18.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22.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Lumix gx9 / 20mm]

사람의 마음

 

오늘 이렇게 쓰임교회 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시작부터 화장실 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우리가 자주 하는 말 중에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 가졌던 마음이 볼 일을 본 후 언제 그랬냐는 듯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쉽게 변하기에 종잡기 참 어렵습니다.

 

에베소서에 대하여

 

누구나 처음 먹었던 생각과 마음을 끝까지 가져가기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어쩌면 인간은 주어진 일이나 사랑을 지속적으로 지켜가기 위해서는 중간중간 새로운 동기나 노력, 외부의 영향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에베소서의 말씀도 비슷한 접근이 가능합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 자신의 신학을 전달합니다. 물론 에베소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바울이 쓴 서신이 아니라는데 의견이 모아집니다. 당시에는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빌려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아마 에베소서도 그러한 방식의 서신이라 여겨집니다. 바울과 2년 이상 관계를 맺어온 교회라 보기에는 바울의 말투와 서신의 분위기가 낯설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에베소서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의 힘이 크다고 여겨집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를 새롭게 정의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재점검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교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까지 확장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읽어보았듯이 에베소서가 말하는 교회는 어느 특정한 지역의 한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역의 교회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교회이해는 오늘날 교회일치 운동에 확고부동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오늘 본문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아마 에베소 교회 내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격차가 점점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이를 알게 된 ‘에베소의 바울’은 지금 믿고 있는 자들도 처음 믿었을 때가 있었음을, 할례 받지 않았던 시절의 삶이 있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처음 자신들이 어떠한 대접과 평가를 받았는지 기억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이었습니까? 이 질문은 모태신앙인지 아닌지를 묻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생김새가 다양하듯이 우리가 믿게 된 계기와 그 시기도 다릅니다. 저는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지만(당시 나는 교회만 다녔다. 제대로 믿게 된 건 아주 나중이다) 어떤 분들은 교회학교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셨고 또 어떤 분들은 청년 때부터, 또 어떤 분들은 성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때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때는 그분만 아십니다.

 

그런데 어느 새인가 우리는 스스로 교회의 중심에 앉아, 신앙의 선배가 되어 믿음이 약한 자(믿음이 약해 보인다는 표현이 맞을 듯)들을 평가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14)를 믿지만 그 믿음이 무색하게 사람과 사람을 가르기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허물어 원수된 것을 없앤 주님(14)을 믿지만 그 믿음이 무색하게 사람 사이에 담을 쌓고 있습니다.

 

평화의 주님이 하신 일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14)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평화의 주님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얼마나 그분의 평화가 삶에 깃들어 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평화의 주님을 닮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까?

 

원래 이방인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분을 없애시고 선택받은 이와 선택받지 못한 이의 구분을 없애시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분을 없애셨습니다.

 

그럼 이 시대에 이방인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잠재적 그리스도인)을 가리킬 수도 있고, 교회가 싫어 교회를 나간 이들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속되다 하지 않은 이들을 우리가 손가락질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없다고 앞 다투어 말하겠지만 우리는 은연중 이런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늘 말씀 앞에 비춰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의 바울이 말하는 예수는 화해(16), 평화(17), 가족(19), 모퉁잇돌(20)로 상징됩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어떤 것도 가르거나 나누려(divide) 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건 교회 안과 밖을 나누지도 않습니다. 그에게 모든 사람들은 화해해야 할 대상이지만 그렇다고 교리와 신앙으로 화해하려하지 않습니다. 그의 존재로 이 모든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건물의 한 면과 다른 면을 잇는 모퉁잇돌처럼 예수는 모든 것을 이으려 하셨습니다.

 

하나로 만들고 담을 허물고

 

우리가 믿는 주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평화를 상징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전의 삶을 기억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전에 어떤 대접을 받고 살았는지 위치(자리)가 바뀌면 그 시간을 다시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기도하며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처음 교회 안에서 우리는 어떤 낯섦과 불편을 느꼈는지를, 믿기 전에 우리의 마음은 어떠했는지를 말입니다. 우리가 직접 겪었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야 누군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하나로 만든 것을 다시 나누지 마시고, 허무셨던 담을 다시 쌓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신앙심을 기준 삼아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교회 안에 머무는 사람이든 교회 밖에 머무는 이든 말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삼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곧 평화가 되길 바라십니다. 그 길이 더디고 위태롭더라도 함께 걸어갔으면 합니다. 자비로우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BibleSalon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살롱에서 나누는 말씀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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