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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하루, 산티아고

<산티아고 에세이> Day 23. 절박함이 만들어낸 해결책

Day 23. 절박함이 만들어낸 해결책

 

산 마르틴 델 카미노(san martin del camino) – 아스토르가(Astorga) 

: 5시간 (24.7Km) 

 

 

오늘은 아스토르가에 일찍 도착해야만 한다. 며칠 전, 잘못 인출된 돈을 되찾기 위해서다. 사정은 이러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현금이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오랜 순례 기간에 사용할 현금을 모두 뽑아 다닐 순 없기에 필요에 따라, 필요한 만큼 그때그때 찾아서 다닌다. 며칠 전, 바닥난 현금을 충당하기 위해 ATM기로 향했고, 돈을 찾으려는 과정이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스페인어 몇 마디가 뜨더니 인출에 실패했던 금액이 통장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가끔 유럽 여행자들이 겪게 되는 일이라고 하던데, 그 일이 내 눈앞에서 발생한 것이다. 

 

사실 난 그 소식을 2-3일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됐고, 잘못 출금이 이뤄진 마을로부터 멀어 진지는 이미 오래다.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앞으로 거쳐 가게 될 마을에 같은 회사의 은행이 있는지 열심히 알아보았고 드디어 오늘 묵게 될 아스토르가에 그 은행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데 스페인 금융기관은 일 안 하나? 은행 근무시간은 오후 2시30분까지다. 오늘은 반드시 은행 문 닫기 전에 마을에 도착해야 한다. 

 

오늘도 마땅히 쉴 Bar를 찾지 못해 점심은 마을에 도착해 해결하기로 한다. 그런데 오늘따라 걷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휴식 없이 걸어 목적지에 도착해 쉴까, 했지만 배낭 멘 어깨가 어서 쉬라며 고통을 가한다. 그래서 그대로 길거리에 주저앉았다. 바나나 한 개를 단숨에 흡입하고 다시 일어나 걸음을 재촉한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알베르게를 찾아 방 배정을 받고 배낭을 침대에 내동댕이친 후에 곧장 은행으로 갔다. 낯선 동양인이 은행에 등장하자 다들 멀뚱멀뚱 쳐다본다. 물론 당시 내 몰골은 더 설명하지 않겠다. 

 

번호표를 뽑고 현지인들 사이에 줄을 서 있던 나는 나의 요구사항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열심히 영어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머지않아 내 순서가 왔지만, 곧 절망을 맛보았다. 영어를 할 줄 모른다는 은행 직원은 대화가 되지 않아 도움을 줄 수 없다며 나를 데스크 앞에 우두커니 세워뒀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은행 구석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러자 직급이 좀 높아 보이는 한 여성이 다가와 이야기를 건넨다. 이 처량한 동양인의 요구를 들어주고자 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직원 역시 영어를 할 줄 몰랐고 나 역시 스페인어를 할 줄 몰랐다. 그래도 어렵게 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의사전달을 해야 한다. 휴대 전화를 꺼내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꾸역꾸역 대화를 시도해본다. 

 

몇 마디 주고받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친다. 원활하지 않은 대화 때문에 오는 피로감과 한 끼도 먹지 못해서 오는 굶주림까지 더해져 모든 걸 포기하고만 싶어진다. 물론 베네딕토 성인은 이런 말을 했다지. “지혜로운 사람은 그의 적은 말수로 알아본다. 침묵을 위해 때때로 좋은 대화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페터 제발트, 『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p.78) 

 

하지만 지금은 서로가 그놈의 지혜롭기를 포기해야 할 때 아닌가? 왜 이렇게 서로 침묵(의사소통의 부재)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결국 해냈다. 상황 전달에 성공한 것이다. 그녀는 전산상 오류일 수 있으니 다시 입금될 때까지 기다려보라고 한다. 좋다, 그래도 희망이 생겼다. 그렇게 은행을 벗어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모든 기력이 소진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누군가에게 요구하고 부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늘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주는 것에 익숙했기에 착하고 좋은 사람이란 말을 들으며 자랐다. 어릴 땐 착하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기에 자랑스러운 일로 여겼는데, 조금씩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이다 보니 착하다는 말 뒤엔 다른 의도가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낯선 땅’과 ‘낯선 사람들’, ‘낯선 언어’가 ‘낯선 하나의 사건’에 담겨 내게 왔고 소극적으로만 살아온 내가 그 ‘낯섦’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부딪쳤기 때문이다. 그렇다, 작은 자기 극복의 계기를 나누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내가 못 돼 졌음을 말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나는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그 돈을 찾겠다는 절박함으로 가득했다. 간절함이 나를 움직였고 용기를 갖게 했다. 물론 금액의 크기도 한몫했지만, 그보다 그 돈에 담긴 스스로의 억울함과 답답함, 빨리 알아채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 등이 나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그 누구라도 절박한 일 앞에 머뭇거리진 못할 것이다. 

 

안다. 길을 걷는 것이 무료하다고 느껴질 땐 절박함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아야 한다. 현재의 삶이 무료하고 지루할 땐 절박함을 발견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누구든, 삶을 재정비해야 할 때가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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