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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산 밑으로 내려가자

20141123 청파교회 1부 예배 설교

 

산 밑으로 내려가자

 

<마태복음 25장 31-46절>

 

31.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 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33.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37.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38.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39.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40.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41. 그 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43.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44.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45.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6.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故 채희동 목사님 10주기 추모모임

 

지난 주 월요일 <故 채희동 목사님 10주기 추모모임>에 다녀왔습니다. 그 분이 누구신지 모르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 목사님께서 쓰신 책 중에 잘 알려진 책으로는 <걸레질하시는 예수>와 생명·영성 잡지인 <샘>이 있습니다. 그 모임에 참석해 추모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 영상에 사용된 배경음악이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눠보고 싶어 한번 찾아봤습니다. 그 노래는 노래꾼 '홍순관'님이 부르신 <산 밑으로>라는 노래였습니다. 그 가사 가운데 한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홍순관 - 산 밑으로 中>

 

산밑으로 마을로 내려가자 

내사람들이 또 거기에 있다 

맨발로 맨발로 내려가자 

내 그리스도가 또 거기에 있다. 

 

이제 나는 山밑에서 살겠습니다 

동산에 올랐던 시간을 안고 산밑에서 살겠습니다 

거기 남겨둔 이야기와 눈물을 가끔씩 꺼내어 보며

저 밑에 당신을 처음 만났던 때가 보입니다

부끄런 맘으로 동산 곳곳에서 솔나무 향 맡으며 

새를 따라 날기도 하여 배고파 사과나무로 달려갔던 일 

바위에 앉아 노래 불렀던 그 시간들을 

나는 일기처럼 잊지 않겠습니다

동산을 오르다 만났던 나무 돌멩이 꽃 잡초들.

나는 인사도 제대로 못한것 같아 마음에 걸리나

여기가 다 하나님의 山 이니 그리 걱정은 없습니다

만남의 여정이 끝나갈수록 오히려 피곤이 없어집니다

우리의 만남은 무엇을 모으려 한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버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이 동산을 내려갑니다

산 밑 어딘가에 또 살고 계실 예수의 집한쪽에 방을 얻어

나는 거기에 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인사드리겠씁니다

'하나님 학교 다녀왔습니다' 

 

山밑으로 마을로 내겨가자 

왜 사람들이 또 거기에 있다 

맨 발로 맨발로 내려가자 

내 그리스도가 또 거기에 있다.

 

이 노래의 가사는 마치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저 높은 곳 어딘가’가 아니라 서로 어깨동무하며 눈높이를 같이 하는 ‘저 산 아래 어딘가’가 되어야 함을 말하는 거 같았습니다. 산 밑에 살고계신 예수님과 함께 높고 낮음이 없는 세상,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평생의 과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들었던 말씀도 이 노래가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최후의 심판”

 

오늘 본문말씀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그 소제목은 “최후의 심판”입니다. 오늘은 감리교 교회력에 따르면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이면서 동시에 “왕국주일”이기도 합니다. “왕국주일”이라고 하니 뭔가 무시무시한 느낌마저 듭니다. 이 날은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그 나라가 이 땅에 펼쳐질 것을 기대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이 날은 어떤 이에게는 애타게 기다리던 날이고, 어떤 이에게는 몹시 두려운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때가 곧 마지막이 될 것을 암시하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이라고 비유하시며, 인자가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고. 그 때 그는 모든 민족을 앞에 불러놓고, 양과 염소를 가르듯 그들을 양쪽으로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을 칭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입을 것이 없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아플 때에 돌봐주었으며,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35-36).”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실제 인자를 이렇게 대한 적이 없다고 반응합니다. 오히려 저희가 언제 그랬냐며 반문합니다. 그러자 인자는 말합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40).”라고 말입니다.

 

이번엔 인자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왼편 사람들에게는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과 정확히 반대경우의 예를 들어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고, 입을 것이 없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아프거나 감옥에 있을 때 찾아주지 않았다(42-43).”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도 실제 인자를 이렇게 대한 적이 없다고 반응합니다. 이들 또한 언제 그랬냐며 반문합니다. 그러자 인자는 말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45).”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움직여야 했다.

 

최후의 심판은 내가 알고 모르고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심판의 때에 형벌을 피하는 길은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였습니다. 다시 말해 배고파하는 이에게 먹을 것을, 목말라 하는 이에게 마실 것을, 외로워하는 이에게 따뜻함을, 입을 것이 없는 이에게 입을 것을, 아파하는 이에게 돌봄을, 삶이라는 감옥에 갇힌 이에게 위로를 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 행함을 보여줄 대상이 중요한데,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그 대상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 지극히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입니다.

 

학창시절,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 중 하나가 자기보다 못한 이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 땐,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거의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못한 친구들을 구별해 냅니다. 물론 여기서 자기보다 못하다는 것은 각자의 주관적인 판단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헌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대우와 그런 여김을 받는 이가 바로 자신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보잘 것 없다”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가치가 없고 하찮다”라고 나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가치가 없다는 말은 “쓸모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내 판단과 내 눈에 쓸모없어 보이는 그 사람 속에 예수께서 숨어계신다고 하십니다. 늘 위대한 스승으로만 비춰졌던 예수가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에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

 

그러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누구일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혹시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이들이 있습니까? 그들 속에 예수가 숨어 있을 수 있고, 그들이 예수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예수일 수 있느냐 라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아주 우리 가까이에 계실 수도 있습니다.

 

산의 사람, 거리의 사람 예수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나기도 하시지만, 또한 보잘 것 없이 여겨지는 이들 곁에 머물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산의 사람”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그가 등산을 좋아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 인생을 대관할 수 있었고, 산에 올라 앞을 멀리 내다보기도 하셨습니다. 그는 산에서 영원한 가치를 붙들었고 당시 감히 누구도 꿈꿀 수 없었던 사랑이 가득한 무서운 미래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산의 사람”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산에만 머물지 않고 거리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제자를 택하셨고 길거리에서 병을 고치셨고 길가에서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신성한 제도도 정통의 교리도 돌아볼 여지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세리와 죄인으로 더불어 즐겁게 사귀었고 신음하는 병자들을 안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이들 곁에 다가가 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나

 

그럼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저 높은 곳 어디일까요, 아니면 저 산 아래 어디일까요? 남녀노소, 높고 낮음 없이 모든 이들을 품어 안던 교회가 이제는 제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깝게는 내 시선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들로 시작해, 이 사회로부터 보잘 것 없는 여김을 받는 이들의 “가치”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나라는 자아의 벽에 부딪히기도 할 것이고, 세상의 보이지 않던 거대한 벽에 부딪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 길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이 일들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갈수록 살기 힘든 이 세상, 세상은 자꾸 우리를 보며 산 위로 올라가라고 할 때라도, 묵묵히 산 아래로 내려와 모든 이들의 이웃이 되어주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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