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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외면할 수 없었던 눈길

20140824 청파교회 1부 예배 설교

 

 외면할 수 없었던 눈길

 

<마가복음 5장 25-34절>

 

25.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26.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27. 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여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그 여자는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29. 그래서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그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
30.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제자들이 예수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33.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34.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프란치스코 교종 신드롬

 

얼마 전, 신드롬이라 할 만큼 TV나 인터넷에는 프란치스코 교종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그가 갔던 곳이나 그가 했던 말, 그가 탔던 차까지도 이슈가 됐었습니다. 그의 한국 방문 시기는 세월호 사건으로 국민들의 마음이 어려운 시기와 맞물렸습니다. 그랬기에 그의 섬세한 말과 행동은 한국 국민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무엇이 우리에게 그런 인상을 주었을까 생각하던 중, 떠오른 한 가지는 그의 ‘시선’이었습니다. 그의 눈과 관심은 우리가 보지 못하고 또 보기 꺼려했던 것들을 향했습니다. 그의 눈과 몸은 타국 땅의 아픔과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눈을 가졌는가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예수님과 많이 닮아보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눈은 늘 아픔이 있는 낮은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몸을 옮겨 아픔의 현장으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눈을 갖고 있지만 같은 눈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눈의 크기와 생김새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하늘을 볼 때, 어떤 이는 땅을 봅니다. 또 어떤 이는 자기 밖으로 눈을 향할 때, 어떤 이는 자기 안으로 눈을 향합니다.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도 달라집니다.

 

두 주 전, 중고등부는 거창과 산청으로 생명평화기행을 다녀왔습니다. 기행 마지막 날 밤, 중고등부는 함께 영화시청을 했습니다. 영화시청 중 몇몇 친구들이 바람 쐬러 교회 마당에 나갔었다고 합니다. 밖에 나간 친구들이 우연히 하늘을 올려봤는데,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쏟아질 듯 한 무수한 별들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별들이 있다는 것에 놀랐고, 또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데, ‘우리의 눈이 향해야 하는 곳은 바로 저곳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쁜 일상을 살다가도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이라 함은 진짜 저 공중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는 곧 나를 돌아보고 주위를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삶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건 일상의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하나의 바람이기 하지만,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을 본 우리 친구들이 잠시나마 하나님의 섭리에 놀랐었기를 바라봅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말씀으로 돌아가 잠시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거라사’라는 동네 건너편으로 넘어오면서부터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회당장 야이로와 마주치게 됩니다. 자신의 어린 딸을 살려달라는 간곡한 요청으로 그와 함께 걷던 중 예수님께 하나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던 터라 큰 무리가 예수님을 보고자 그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24절은 ‘큰 무리가 뒤따라오면서 예수를 밀어댔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지금처럼 유명인들을 경호하는 경호원들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옷깃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몸을 만지는 이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군중과 함께 걷던 예수님께서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 함께 걷고 있던 제자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살짝 어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 주위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고 또 성서에 기록되었듯이 그 사람들이 예수를 밀어대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옷에 손을 댄 이는 한두 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자신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을 찾기 시작하십니다.

 

저는 사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이 늘 불편하게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감히 허락도 없이 내 옷에 손을 댔냐고 혼낼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옷에 손을 댄 그 사람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변화를 받은 이를 만나야만 했습니다. 혼내고 벌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갑작스레 치유를 받게 된 그 사람의 ‘참된 평안’을 위해서였습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그 사람을 찾아야만 했는지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자

 

예수님의 옷깃을 만진 사람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알아 온 여자였습니다. 아마 중고등부 친구들 중에 ‘혈루증’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친구도 있을 겁니다. ‘혈루증’은 ‘하혈병’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자궁의 출혈을 뜻합니다. 여성에게서만 나타나는 질병으로, 불규칙하게 자궁에서 피가 나는 병을 말합니다. 이 ‘혈루증’은 구약성서 <레위기>에 부정한 병으로 일컬어져 그 사람이 만지는 모든 것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께서 사셨던 당시 유대사회는 그나마 구약 시대보다 사람에 대한 대우가 나아졌겠지만, 그렇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삶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잘 알 수 있을 듯합니다. 사람다운 대접을 못 받으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이 여인은 이 지긋지긋한 병에서 낫고자 여러 의사를 찾아갔었지만 고생은 고생대로, 돈은 돈대로 썼고 결국 나아지는 것 없이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고 말합니다(26절). 다시 한번 우리는 여인의 절망을 알 수가 있습니다.

 

더 이상 나아질 기미가 없었던 이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갔을 겁니다. 자신이 나을 수만 있다면 어떤 소문이라도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고, 그녀는 수많은 군중들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그때 그녀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29절을 보면 출혈의 근원이 마르고, 자신의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여인은 불안했습니다. 몸이 나은 것은 느꼈지만, 마음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뭔가 허락받지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제자들을 향해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라고 물었던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지금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몸의 치유뿐만 아니라 ‘무너져버린 사람들과의 관계’와 ‘짓밟혔던 마음의 회복’임을 말입니다. 여인의 감춰진 삶까지 느끼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진심이 담기 이 따뜻한 한 마디를 건네며 그녀를 돌려보냈습니다. 이제 그녀는 몸의 회복뿐만 아니라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존중받았다는 사실에 그녀의 삶 전체가 고통과 억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외면할 수 없었던 눈길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지 않으셔도 됐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의 조심스런 행동에서 예수는 그녀의 이제까지의 모든 고통을, 단 하나의 희망이라도 잡고 싶어 하는 그녀의 심정을 아셨습니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예수가 위대한 예언자들과 달리,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이들의 애환을 못 본 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사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눈은 늘 어두운 곳을 향했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럼 같은 것을 보더라도 제대로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실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은 객관적으로 보면 아름답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눈이 제대로 박힌 자식이라면, 그 주름의 갈피마다 담겨 있는 삶의 이야기를 아는 자식이라면, 어머니의 주름 속에 숨겨진 사랑과 희생을 볼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사내의 비참한 최후를 보았지만, 백부장은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눈은 우리를 속일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픔이 많기에 할 일도 많은

 

여전히 주위에서 아파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울음소리와 밀양 송전탑 주민들의 울음소리, 저 먼 바다 강정마을의 울음소리 등. 여전히 이 땅의 평화는 요원하기만 해 보입니다. 언제쯤 이 세상에서 슬픔의 소리가 그치고 웃음소리가 가득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로만 향하는 우리의 눈을 밖으로 돌릴 때, 이 땅의 평화는 시작될 것입니다.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여 외면했던 누군가의 아픔에 우리의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그 아픔은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의 아픔일 수도 있고, 조금은 멀리 떨어진 이들의 아픔 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그곳으로 우리의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아픔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예수님의 그 마음에 우리도 접속돼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이며 하나님을 믿는 이유일 것입니다.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부터 관심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당연하게 여겨 무심했던 이들의 아픔에 눈길을 향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바라보면 나와 무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쪼록 나를 넘어 너에게로 넘어가는 삶을 꾸준히 연습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살롱에서 나누는 말씀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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