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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가라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20170723 쓰임교회 주일설교

 

가라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마태복음 13장 24-30; 36-43절>

 

24.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25.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26. 밀이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27.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28.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였다.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하였다.

29.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30.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

 

36. 그 뒤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서, 집으로 들어가셨다. 제자들이 그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밭의 가라지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십시오."

3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 밭은 세상이다. 좋은 씨는 그 나라의 자녀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다.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추수 때는 세상 끝 날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40. 가라지를 모아다가 불에 태워 버리는 것과 같이, 세상 끝 날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41. 인자가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죄짓게 하는 모든 일들과 불법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 나라에서 모조리 끌어 모아다가,

42. 불 아궁이에 쳐 넣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 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Lumix gx9 / 20mm]

무더위 속에 돌아보아야 할 것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요즘 날씨가 참 대단하지요? 폭염, 열대야가 우리 입에서 연신 ‘덥다’라는 말을 뱉어내게 합니다. 우리는 계절의 변화 속에 깃든 주님의 세심함과 섬세함이 축복임을 잊지 않습니다(창조력). 그러나 조금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러한 무더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창조의 경계선을 자꾸 넘는 결과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분별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우리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환경의 갑작스럽고 낯선 변화는 다 이유가 있겠지요. 그 불안한 변화의 중심에 인간이 있음을 우리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사실 적나라하게 이야기하자면 발전과 계발이라는 명목 하에 산과 들과 바다를 깎고 파헤치고 잘라내고 또 천연 자원을 마구 사용하는 탓에 자연의 신음소리가 기후의 변화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지금의 무더위를 탓하기 이전에 각자의 삶의 태도부터 돌아보고 바꾸어내는 것이 먼저입니다. 자연을 돌보고 살리는 일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밀과 가라지를 그대로 둔 주인

 

첫 이야기가 무거웠습니다. 물론 인간의 무분별함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완전히 떠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심판이 염려가 될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심판을 지연시키고 있는 선한 사람들(의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을 돌보고 에너지를 아끼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고 아픔을 당한 사람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사람들 즉, 생명과 평화를 위해 열심히 복무하는 이들의 수고를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기억하기 이전에 우리는 과연 어디에 서 있는지 생각해 봐야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질문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조금 전에 드린 말씀을 함께 생각했던 건 아닙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예수께서 좋은 씨와 가라지의 비유를 드신 이야기도 제가 말씀드린 서두의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에 나눈 마태복음 말씀 바로 이어서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 예수께서는 무리를 향해 ‘씨 뿌리는 사람’에 관해 말씀 하셨습니다. 이어서 오늘도 하나의 비유를 통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하늘나라는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고 하시며 하나의 비유를 전하십니다. 밀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잠든 사이 원수라는 자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도망갔습니다. 가라지가 뭔지 다 아시죠? 볏과에 속한 한해살이 풀입니다. 독성이 강해 추수 때가 되면 뿌리째 뽑혀 불에 태워지곤 하는 풀입니다. 그런데 거두어야 할 열매인 이 밀들 사이에 원수라는 자가 가라지의 씨를 뿌리고 갔습니다. 가라지는 볏과에 속하기 때문에 자라는 중에는 밀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밀의 줄기가 자라 열매 맺을 때가 돼야 가라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종들은 이 사실을 주인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것이 원수가 한 행위임을 알았음에도 밀이 다 자랄 때까지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보았더니 주인은 충분한 시간이 지나 밀이 여물 때가 되기 전에는 밀과 가라지의 구분이 어려워 혹시나 가라지를 뽑다 밀까지 뽑을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인이 인심이 넉넉한가? 이렇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는 뽑아 불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들일 것을 명합니다. 주인은 잠깐의 유보는 있되 때가 되면 확실한 구분을 지을 것을 염두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씨와 가라지 비유에 담긴 의미

 

이 비유의 이야기가 끝나자 모든 무리는 예수 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집으로 돌아갔고 집에 도착한 제자들은 예수께 그 비유를 해석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차분히 그 비유에 담긴 함의를 알려주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사람 즉, 예수 본인 스스로였음을 알려주시고 ‘밭’은 이 세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추수 때’는 세상 끝 날이며, ‘추수꾼’은 천사들임을 알려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가라지를 모아다가 불에 태워 버리는 것과 같이, 세상의 끝 날에도 그렇게 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현실에 맞게 적용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천사를 보낼 것인데, 천사들은 죄를 짓게 하는 모든 일들과 불법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나라에서 모조리 끌어 모아다가 불 아궁이에 처넣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 불 아궁이에 들어간 모든 사람들은 울면서 자신들의 지난 시간을 후회하고 이를 갊이 있을 거라 하십니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던 저자 마태

 

사실 이 말씀을 읽고 나면 예수를 믿는다는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과연 좋은 씨앗인가 아니면 가라지인가? 생각이 많아지는 본문입니다. 본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잠시 곁길로 빠져본다면 오늘 본문에 ‘하늘나라’ 개념에 관한 중요한 단서 하나가 나옵니다. 24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25절에는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자 마태는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고 기록할 수 없어 하나님이라는 명칭대신 ‘하늘’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하늘나라’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말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개역개정(성경)의 표현으로 보자면 ‘천국’이 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하늘나라’를 정확히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정리해본다면 마태복음이 말하는 ‘하늘나라’는 하늘 저 위에 있는 어떤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의 본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하늘나라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내가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된다는 말말입니다. 

 

이 이야기에 다른 증거가 방금 읽은 말씀에 있습니다. 24장에 하늘나라를 설명하며 하늘나라는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고 하는데 그곳에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고 갑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그럼 하늘나라에는 좋은 씨와 가라지가 함께 머물고 자라는 곳이 됩니다. 다시 말해 이 말은 뭡니까? 하늘나라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 있는 곳을 가리킨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이 말이 정확히 맞는 말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구절입니다. 

 

[Lumix gx9 / 20mm]

가라지의 비유는 오로지 심판을 위함인가?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서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는 좋은 씨앗인 ‘의인’은 하나님과 함께 해 같이 빛날 것이고 ‘악인’인 죄짓게 하는 모든 일과 불법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나라 밖에 모조리 끌어다가 불 아궁이에 처넣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인 사랑과 정의, 공의의 법 바깥에 있는 자들에게는 엄청난 심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스스로가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번 가라지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과연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에 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의 비유는 그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만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요? 얼마 전 종영했던 드라마 <도깨비>가 있습니다. 공유, 김고은이 출현했던 드라마인데요. 그 드라마에는 사람이 죽게 되면 반드시 거치게 되는 이생의 기억을 지우는 ‘찻집’이 등장합니다. 그곳에서 모든 사람은 이생의 기억을 지울지 말지를 결정할 차 한 잔씩을 받습니다. <도깨비> 최종 편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죽음을 맞이한 높은 지위의 사람과 그 사람의 전용차를 운전하는 운전사가 그 찻집을 찾아옵니다. 그곳에서 저승사자 역할을 하는 이동욱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과 겸상을 하고 있는 것이 내키지 않은 직급 높은 사람을 향해 이 찻집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 차 한 잔을 마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이 가진 그 어떤 것도 이 찻집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생에서 눈으로 지은 죄, 입으로 지은 죄, 손발로 지은 죄, 마음으로 지은 죄가 얼마나 힘인 센지 그런 짓을 한 사람을 지옥의 어느 바닥까지 끌어당기는 지 경험해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던 부러울 것 없이 살던 높은 지위의 사람은 그제야 슬퍼하며 지난 삶 때문에 후회하게 됩니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가라지의 비유

 

오늘의 본문의 묵상과 드라마의 장면이 겹쳤습니다. 가라지의 심판과 죽음 이후 가게 되는 그 찻집은 과연 신의 심판만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 예수께서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고민해 보라는 거죠. 나는 지금 좋은 씨인가 아니면 가라지인가 생각해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이 말씀 앞에 한번 세워보라는 겁니다. 자신을 찻집에 앉혀놓고 마지막 차 한 진을 마시는 그 순간에 대입해보라는 것입니다. 

 

정말 나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즐거움을 느끼고 기뻐하며 살았는가? 또 누군가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깨닫고 느끼고 나누며 살았는가? 결국 이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다보면 하나님에게 있어 좋은 씨나 가라지는 한끝차이임을 알게 됩니다. 언제든 가라지일 수 있는 우리, 가라지의 길로 가는 이들을 곁에 두고 있는 우리. 우리는 이 가라지의 비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도 이 사실을 잘 아실 겁니다. 경계선을 짓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분의 넓은 이해 속에서 그분과 함께 좋은 씨앗의 길로 걸어갑시다. 추수 때가 되어 가라지를 거둔다는 주인의 명령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기다림의 시간’을 나타내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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