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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가슴으로 살아내는 복음

20170122 쓰임교회 주일설교

 

가슴으로 살아내는 복음

 
<고린도전서 1장 10-18>
 
10.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
1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여러분의 소식을 전해 주어서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2.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은 저마다 말하기를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한다고 합니다.
13.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 또는,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14. 내가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준 일이 없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5. 그러므로,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16. 내가 스데바나 가족에게도 세례를 주었습니다마는, 그 밖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Lumix gx9 / 14mm]

 
​항상 복음을 전하라. 꼭 필요하다면 말도 사용하여라.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여러분, 이탈리아의 아씨시(Assisi) 구두 전승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S. Francesco, 1182~1226)가 했던 말입니다. ​“항상 복음을 전하라. 꼭 필요하다면 말도 사용하여라.”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의 본질은 말이 아니라 행위 즉, 그 모습이나 태도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프란체스코 성인은 복음의 본질을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보다는 삶으로 이웃에게 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합니까? 행위나 삶보다는 말에 힘을 주어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와 성도의 입에서 믿는다, 사랑한다, 회개한다 등의 말은 무수히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그 말을 뒷받침하는 삶의 변화는 보기 힘듭니다. 여러분, 알면서도 행함이 없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맞을까요? 또 믿는다면서 그렇게 살아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게 맞는 것일까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고린도전서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 고린도교회 내에 분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바울은 편지 서두에 인사를 마친 뒤 이렇게 말을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여러분의 소식을 전해 주어서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10-11).”
 
아마 성도들이 교회 내 대표가 되는 특정 인물들 중심으로 몇 개의 분파로 나뉜 듯 보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은 저마다 말하기를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 또는,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내가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준 일이 없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스데바나 가족에게도 세례를 주었습니다마는, 그 밖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나는 모릅니다(12-16).”
 
사람은 자신을 잘 돌봐주는 사람과 하나가 되기 쉽고 또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사람과는 멀어지기 쉬운 그런 존재입니다. 관계의 동물인 사람이 이러한 성향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릅니다. 고린도전서가 기록됐을 당시인 AD 55년경에도 이러한 일은 있어왔습니다. 바울이 설립한 고린도교회 내에 바울 편, 아볼로 편, 게바 편, 그리스도 편으로 성도들이 나뉘는 일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어떤 말들로 인해 편이 갈려졌던 모양입니다. 누구의 말이 더 자신들의 마음과 부합하는지에 따라 파가 나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와 비교가 가당키라도 하냐는 듯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처럼 세례를 베푼 적은 있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소수의 사람 외에 그런 일을 행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 그리스도가 비교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본질인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17-18).” 바울 사도가 말한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항상 복음을 전하라. 꼭 필요하다면 말도 사용하라.’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바로 그런 겁니다. 복음의 본질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도 혹은 교회의 됨됨이는 말의 지혜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내는 자의 태도, 모습으로 증명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십자가’가 복음을 삶으로 살아낸 자를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자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그것은 또한 부활을 통한 새로운 시작과 희망이 되었습니다.
 
​심장과 섬세함으로 서로에게 다가가는 실천, 행위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합리적인 생각과 판단만으로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정신과 의사이자 뇌 과학자인 빅터 프랭크는 그의 책 <심리의 발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정신분석과 지능 검사, 테스트에서 출발한 우리의 결론, 즉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에만 근거하여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로는 개개인의 정신 기능과 눈에 띄는 기능 안에 숨어 있는 본질을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면, 그것은 인식과 이해의 다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다리의 거점은 두뇌가 아닌 심장입니다. (생략) 정신 의학적 진단 방식에 있어서도 이성의 명민함보다 감정의 섬세함이 더 앞설 수 있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 빅터 프랭크, <빅터 프랭크의 심리의 발견>, 청아출판사, p.205
 
빅터 프랭크는 누군가를 잘 이해하고 잘 알기 위해서는 두뇌보다는 심장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성의 명민함보다 감정의 섬세함이 타인을 이해하는데 훨씬 중요한 요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집합체인 교회는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그룹이 나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합니다. 고린도교회도 그러했거니와 지금의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 분열의 시발점은 대화와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 상처를 수반한 불화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 편, 아볼로 편, 게바 편, 그리스도 편으로 나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심장 혹은 감정의 섬세함의 부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복음의 본질’은 말보다는 삶의 실천, 행위에 있다고 반복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조금은 거창해 보이는 ‘복음의 본질’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복음의 본질을 살아가는 첫걸음이자 마지막 걸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새로운 공동체이자 또 하나의 가족인 교회의 성도들과 또 우리와 함께 일하는 일터의 동료들, 그리고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가족과의 관계부터 돌아보고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실천과 행위가 가장 먼저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첫걸음을 시작으로 더 깊고 넓은 곳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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