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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내가 너를 빛으로 삼았다

20170115 쓰임교회 주일설교

내가 너를 빛으로 삼았다

<이사야 49장 1-7절>

1. 너희 섬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희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
2.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님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님의 화살통에 감추셨다.
3.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4.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
5.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 야곱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모으시려고, 나를 택하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내 힘이 되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7. 이스라엘의 속량자, 거룩하신 주님께서, 남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람, 여러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 통치자들에게 종살이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왕들이 너를 보고 일어나서 예를 갖출 것이며, 대신들이 또한 부복할 것이니, 이는 너를 택한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 신실한 나 주 하나님 때문이다."

반가운 청파 가족의 초대를 받으며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여기 계신 분들과 그간 지나온 제 삶과 그 속에 깃든 하나님의 숨결 대해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모르는 분들과 또 저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 하셨을 분들을 위해 제 소개도 할겸 근황을 갖고 오늘의 이야기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몇 개의 에피소드를 나누겠습니다.

새로운 일터에서 맞은 당혹감

제 기억으로 저는 2011년 쯤 청파교회에 왔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저는 신학생의 신분이었지만 청파교회에서 사역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지난 교회에서의 험난했던 사역과 논문 때문에 너무 지쳐 있었고 또 수련목회자 시험을 한번 떨어지는 등 여러 악재(!)가 겹쳐서 사역을 쉬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청파교회를 알게 됐고 혼자서 이곳에 찾아와 조용히 주일 예배만 드리고 집에 가기를 몇 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어딘가 허전함에 소속을 두고 싶었고 그 즈음 자발적으로 청년부를 찾아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인연이 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신학교 동기의 소개로 감리교 수련목회자 과정(인턴)이 인정되는 한 기관(단체)의 담당자를 만나게 됐고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제 삶의 소소한 변곡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왜 새로운 변곡점이었는가하면 일반적인 목회자들이 걷는 넓은 길이 아니라 굉장히 좁은 어떤 길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 그 기관에 들어가 6개월 이상은 방황했던 것 같습니다. 직장인들처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근하며 ‘나는 누구인가’, ‘또 여긴 어딘가’를 계속 생각하며 지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믿는  기독교의 가치관과 매우 유사했지만,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일들은 몹시 낯설고 거칠어보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금까지 제가 알고 지냈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여기가 무얼 하는 곳인지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낯선 환경에 떨어지자 혼자라는 생각에 몹시 불안했습니다. 물론 그곳에서 3년의 수련목회자 과정을 마치고 지금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그곳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사는 곳이었고 무엇보다 그곳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렘과 불안함을 주는 ‘새로움과 낯섦’

여러분은 새로운 것 혹은 낯선 것을 생각하면 어떤 생각부터 드십니까? 늘 반갑고 좋기만 하십니까? 사실 새롭고 낯선 것은 늘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져다줍니다. 우리 일상에 그런 것들이 뭐가 있을까요? 새로운 직장에 간다는 것, 새로운 교회를 다니게 된다는 것,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간다는 것,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 새로운 남자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 결혼 등 새로운 것은 늘 우리에게 양가감정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 새롭고 낯선 것만큼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나를 성숙하게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독일의 시인 ‘릴케’는 새로운 시작은 늘 아름다운 것이기에 그 하나하나가 신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한 대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그 하나하나마다 새로운 시작이며, 시작 자체는 늘 아름다운 것이기에 그 하나하나가 신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당신을 왜 알지 못하나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고려대학교출판부, p.61)

릴케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건네려는 게 아닐까요? 신의 출현, 다시 말해 신이 우리를 통해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것이 나 스스로를 내가 낯설게 느껴야 한다는 것 아닐까요? 저는  낯선 무언가가 나와 우리 속에 들어와 불편하게 할 때, 나와 불협화음을 낼 때가 바로 하나님이 나와 우리를 통해 무언가 시작하고자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건 고독한 일

그런데 또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사실 내가 낯설고 새로운 존재가 되면 주위로부터 반가움이나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스스로 고독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매우 낯선 존재였습니다. 그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말과 새로운 행동을 했습니다. 청파교회에서 늘 나누던 이야기라 그리 낯설 것도 없겠지만, 예수가 살던 당시에 그가 했던 말과 행위는 몹시 낯설고 위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는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당대의 사람들은 예수의 새로운 복음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은 무엇에 관해 말합니까?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가 잃은 소중한 전통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가장 크게 잃은 정신이 이것 아닐까요?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요 12:25)”라는 요한의 정신 말입니다.

물론 제가 지금 당장 나가서 싸우다 죽자, 뭐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돈이 주인인 세상에 새로운 율법을 들고 나타나면 세상은 그리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조금 고독해지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과 또 이곳에 모인 사람들처럼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개념은 우리 일상과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습니다. 부활은 그렇게 살아본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교회에서 맞은 당혹감

이야기를 준비하다보니 청파교회 나가기 전 이야기만으로도 꽤 길어졌습니다. 청파교회에 몸담고 있을 동안의 에피소드는 각설하고, 여기서 나간 후 이야기 한 가지만 더 나누고 마칠까합니다.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법) 상 목사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수련목회자 과정을 마치면 반드시 단독목회를 해야 했습니다. 물론 대학원 졸업 후 바로 단독목회를 시작해 안수를 받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청파교회에 있다가 단독목회를 나가자마자 그 해에 법이 바뀌었습니다. 단독목회를 나가지 않아도 안수를 주는 제도가 생긴 것이지요. 그 교회에 그대로 있으면서 안수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감리교는 내가 뭘 잘못했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그지 같았습니다. 농담입니다. 사실 청파교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인연의 끈을 끊을 때 많이 힘들었습니다. 원래 저도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고 또 무엇보다 사람들과 한번 정이 들면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 성격이기에 마지막은 늘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목회 자리가 전국 각지에서 들어왔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인생은 잘 살았었나봅니다. 가장 가까운 곳으로는 은평구가 있었고 가장 먼 곳으로는 대구가 있었습니다. 거리와 돈 문제, 개인적인 두려움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왕 이렇게 된 거 1년 유급까지 할 생각이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천천히 받을 생각이었습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의 부담과 걱정, 안수 받으면 이제는 정말 하나님한테 코끼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합리화를 하고 있던 중에 연회 안수식이 있던 두 주 전쯤, 연고도 없고 지인도 없고 더구나 성도도 없는 성남의 한 교회인 쓰임교회에  부임하게 됐습니다. 절대 청파교회 목사님들의 외압(!)은 없었습니다. 제 선택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나가보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몹시 당황스러웠습니다. 물론 ‘2년이 다 돼가는 지금은 이제 알겠다.’고도 말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잘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쓰임교회에 있는 동안 발견한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내가 무얼 좋아하고 무얼 할 때 가장 즐거워하는지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가 무슨 쾌락을 쫓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목사라는 신분을 벗겨내고 그저 한 명의 사람으로 이 땅을 사는 동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걸까라는 질문을 갖게 됐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하면 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저는 그 생각에서 벗어나 좀 자유롭게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목회라는 폭넓음과 다양성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일이 무엇일지 분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사는 일

여러분들은 지금 지내는 게 어떠십니까? 지금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지내십니까? 아니면 어느 정도 세상과 타협을 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현재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서머싯 몸이 쓴 <달과 6펜스>라는 고전을 읽어보신 분 계실 겁니다. 천재 화가인 ‘폴 고갱’의 삶에 관해 쓴 책입니다. 잠시 책에 관해 말씀 드리면, 주인공은 처자식이 딸린 마흔 살의 전형적인 주식 중개인이자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어느 날 자신은 반드시 그려야 한다고,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며 안정된 직장과 가족을 버리고 홀로 떠나버립니다.

단순히 이 이야기만 들으면 고갱이 굉장히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이 책에서 말하려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따뜻한 집을 나간 그는 허름한 집에서 살며 아파도 약 살 돈도 없이 지내지만, 그림에 관한 열정 하나만으로 살았습니다. 책의 저자는 고갱의 삶을 통해 정말 자기 속에서 솟아나오는 것을 살아내려는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두 주 전 김기석 목사님께서 설교 중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이기에 하는 이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풀어보았습니다. 참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된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 모양새가 어떻든 간에 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또 하나의 고전이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중학생 필독서라고 하는데, 여전히 중학생 수준인 제게 생각할 걸 많이 던져주었습니다. 이 책에 이런 글귀가 나옵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p129).” 그리고 또 하나의 유명한 글귀인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p123).” 여러분은 정말 여러분 안에서 솟아 나오려하는 것을 살아내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고 계신지요. 아니면 이미 알에서 나와 자유롭게 날고 계십니까?

1년 중 주중에 두 세 차례 청파교회에 놀러옵니다. 그 때마다 김재흥 목사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제 고민에 가장 고개를 끄덕여주실 때가 있는데, 그 때가 언제냐 하면 ‘나는 정말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혹은 ‘정말 나는 나답게 살고 있는가?’라는 고민을 갖고 이야기를 드릴 때입니다. 왠지 그 끄덕임 속에 목사님 자신의 고민과 생각도 담겨 있어 보였습니다. 얼마 전 <미움 받을 용기>이라는 책이 유행했던 건 사람들 스스로가 이제는 타자(외부의 시선)의 시선으로 나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주체(내부의 시선)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싶어서가 아니었겠습니까?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오늘은 성탄이 지나고 예수의 공생애를 기념하는 그 두 번째 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향해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6).”고 했습니다. 이사야 1장에서 39장까지는 죄지은 백성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로 채워져 있지만, 오늘 본문이 포함된 40장부터는 구원을 향한 메시지가 그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어떤 분인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불의에 관해서는 불같이 노하시지만 태생(!)적으로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주는 분 아니십니까(출 34:6)?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은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없고 허무한 일에 힘을 낭비한 것 같다(4)”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과거와 현재가 의미를 잃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도록 너를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왕들이 너를 보고 일어나서 예를 갖출 것이다.”

이걸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우리의 수고와 애씀을 잊지 않고 계시다는 것과 새로운 것, 낯선 모든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성숙케 하시는 하나님의 초대라는 것을 말입니다. 또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즐거워하는 동료인 우리 각자는 나다움을 찾아 한번 사는 인생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 는 것’을 멋지게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젊음을 잃지 않는 청파 청년부와 또 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도 이러한 삶을 살지 않으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그분이 가신 길을 우리도 용기 내 걸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이중생활

문학과 여행 그리고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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