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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삭개오를 만난 예수

20161030 쓰임교회 주일설교

 

삭개오를 만난 예수

 

<누가복음 19장 1-10절>

 

1.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2.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3.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4.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6.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7.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10.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500주년을 앞둔 종교개혁주일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교회가 좀 추우시죠? 저는 개인적으로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느끼는 장소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책 한권을 들고 집을 나설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공간이 교회이면 따스한 계절이고, 카페가 떠오르면 추운 계절인 거 같습니다. 얼마 전부터 책만 잡으면 자꾸 카페 생각이 나던데, 아무래도 날씨가 많이 추워지긴 했나봅니다. 몸을 잘 돌보는 것도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이니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교회력의 절기상 ‘성령강림 후 제24주’이자 ‘종교개혁주일’이기도 합니다. 모두 잘 알고 계시겠지만, 종교개혁주일은 1517년 10월31일, 독일 신학자 루터(1484-1546)가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로마 교회의 갱신을 목적으로,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인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잃어버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절기로 16세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를 보면 정말 시끄럽고 탈도 많아 많은 국민들이 멘붕(!)에 빠져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하며, 그 물음 뒤에 주어진 안타까운 가슴을 부여잡고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야 합니다. 그저 사회가 개혁되기만을 기다리기보다 한 사람의 종교인으로써 자신의 일상에서부터 작은 개혁들을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맞이한 종교개혁주일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상 가능한 설교와 그렇지 않은 설교

 

서두가 길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누가복음 19장입니다. 이미 성경봉독 중에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삭개오와 예수가 만난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자주 접하는 본문 중 하나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할 때 잊지 않으려고 하는 원칙 하나가 있습니다.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누군가 서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말미의 이야기가 미리 예상되는 그런 설교는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이러한 원칙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지만, 특히 더 어려울 때가 언제냐면 바로 오늘 본문처럼 우리가 자주 들었던 말씀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아무리 읽고 묵상해도 말씀의 다양한 결(layer)들이 느껴지지 않을 땐, 그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물론 진리가 ‘단순함’이라는 걸 모르진 않지만, 적어도 제 스스로 듣고 싶은 설교를 준비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감동과 깨달음이 목회자의 설교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말씀의 향방을 하늘에 맡기고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족한 없던 삭개오

 

예수께서는 여리고에 들어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1). 그 때 삭개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성경에는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고 했는데, 아마 그는 우연히 그곳에 있었다기보다는 스스로 그곳을 찾아온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3절에서 그가 예수를 보기 위해 어떤 행동을 즉각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잘 나와 있듯이, 그의 직업은 세관장이었고 또 부자였습니다(2). 세관은 세금 징수의 일을 맡아보는 관리를 말하는데, 삭개오는 세관 중에 우두머리인 세관장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가지 세금제도에 시달렸는데, 한 가지는 이스라엘 성전 제사장들을 위한 ‘종교세’였고, 다른 한 가지는 자국을 위한 ‘국세’, 마지막 한 가지는 로마 제국을 위한 ‘제국세’였습니다. 이토록 과도한 세금을 감당할 수 없었던 서민들은 토지를 빼앗기기까지 했기에, 세금 관리인인 삭개오가 미움의 대상이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족함 없던 삭개오가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예수가 자신이 살던 동네를 지나간다기에 그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여 길거리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키가 작었던 그는 수많은 인파에 가려진 예수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둘러싼 무리를 앞질러 저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싶었던 어떤 간절함이 삭개오를 나무 위로 오르게 했습니다(4). 계속해서 무리들과 길을 가던 예수는 나무 위에 오른 삭개오를 보았고 그를 향해 “오늘은 내가 너의 집에서 묵어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5). 과연 무엇이 예수의 눈을 삭개오에게 향하게 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말을 들은 삭개오는 자신의 체면은 안중에 없는 듯, 나무에서 얼른 내려와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셨습니다(6). 그러자 이제는 오히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묵으러 갔다는 말들을 하며 말입니다(7). 

 

이어지는 8절은 삭개오의 집에서 오고가는 대화 장면입니다. 삭개오는 뜬금없이 이런 말을 내뱉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8절 이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예수는 삭개오를 향해 어떤 질문이나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처음부터 예수의 질문이나 어떤 훈계의 말씀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는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삭개오는 왜 예수께 뜬금없이, 마치 고해성사처럼 자신의 새로운 마음가짐을 드러내고 또 자신이 범법자가 아님을 알아서 고백했는지를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이야기만을 듣고 다른 어떤 대답도 없이 다음의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9-10).” 

 

삭개오의 두 가지 행동

 

오늘 우리는 삭개오의 두 가지 행동을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과 다른 한 가지는 스스로 자신의 결백함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스스로, 알아서 이러한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시켜서 한 행동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삭개오로부터 어떤 간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는 형편도 남부러울 것 없는 그인데, 그는 모든 체면과 신분마저 내려놓고 예수를 만났고 그를 집에 모셨습니다. 

 

우리는 주로 오늘 본문을 삭개오의 믿음, 간절함, 회개 등 삭개오의 마음 상태에 중심을 두고 읽어왔습니다. 물론 굉장히 중요한 관점이자 또 중심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만큼은 우리의 시선을 예수께 돌려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는 삭개오의 행동과 말로부터 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예수는 삭개오의 마음을 읽어냈습니다. 삭개오라는 존재를 온 몸으로 느끼셨습니다. 그의 간절함을 읽어낸 것이지요. 

 

아마 삭개오가 평소 입고 다녔던 옷은 일반 서민들과 달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도 옷과 관련된 신분의 개념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위치가 있던 그가 나무 위에 올라가, 뭔가 애처롭고 공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는 여기서 단번의 삭개오의 마음 상태를 읽어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삭개오가 자신의 집에 기꺼이 맞아들이는 것도 모자라, 본인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그 진솔한 모습을 보며, 삭개오에게 새로운 삶이 펼쳐지고 있음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의 표정, 행동, 말 등을 보시며 그 사람의 ‘현재’를 누구보다 잘 느낄 줄 아셨습니다. 

 

카페에서 만난 모자(母子) 이야기

 

며칠 전,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가까운 옆 테이블에 6-7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아이와 엄마가 앉더니, 아이는 문제를 풀고 엄마는 지도와 채점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직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잘 몰라 그러는 것일 수도 있는데, 엄마는 엄마 나름의 방식으로 아이에게 문제에 대한 이해와 채점을 해주고 있었고,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엄마의 지도를 받아 문제 풀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아이와 엄마의 대화를 듣고 있는데, 옆에 있는 제 마음이 괜히 불편해지는 겁니다. 

 

엄마는 아이의 마음은 잘 헤아리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처럼 보였고, 아이는 엄마의 지적에 문제를 풀다가 기분이 상했어도 엄마에게 인정받고자 문제풀이를 계속 하는 그 모습에서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을 느끼게 됐습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옳고 그름은 누군가 대신 판단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제가 두 모자에게 느낀 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이해의 간격이 저렇게 있는데,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느끼고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와 ‘사람 만나기’ 훈련

 

다시 삭개오와 예수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오늘 본문은 삭개오의 마음보다 예수의 시선에 중심을 두어보자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예수는 삭개오의 행동과 말로부터 그의 마음, 심리상태를 읽어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는 뭔가 불안해보였습니다. 아마 지난 삶에 대한 ‘회의’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고독감’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삭개오의 과거를 보지 않으시고 지금, 현재를 보셨습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도 신앙과 맞닿아있기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집중적으로 한 훈련은 ‘기도’와 ‘사람 만나기’였습니다. 그는 매일 조용한 곳으로 가서 홀로 기도하셨고, 또 기도의 힘으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끊임없는 일치를 이루기 위해 애쓰셨고, 또 그 사랑의 충만함으로 경계 없이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내가 ‘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새롭게 보기 어렵다는데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 자기가 알던 사람도 늘 새롭게 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삭개오의 무너진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새로운 존재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던 ‘내면의 눈동자’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예수를 만난 삭개오>가 아니라 <삭개오를 만난 예수>로 정해봤습니다. 뭐가 다른가 싶으시죠? <예수를 만난 삭개오>는 삭개오의 간절함, 절박함에 그 중심이 있고, <삭개오를 만난 예수>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예수에 그 중심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는 주로 삭개오의 믿음, 간절함만 볼 뿐 예수가 삭개오를 구원한 그의 섬세한 마음을 이야기하진 않습니다. 예수를 우리 삶의 길잡이로 여긴다면, 우리도 예수가 사람을 바라보던 그 ‘내면의 눈동자’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물론 쉽진 않겠습니다만, 우리 주변을 살아가는 이웃들을 바라볼 때, 또 본인 스스로를 바라볼 때, 삭개오를 바라보던 예수의 그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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