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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인내하며 소망하는 삶

20161211 쓰임교회 주일설교

 

인내하며 소망하는 삶

 

<야고보서 5장 7-10절>

 

7.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며,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

8.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9. 형제자매 여러분,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심판하실 분께서 이미 문 앞에 서 계십니다.

10.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Lumix gx9 / 20mm]

세 번째 촛불을 밝힌 대림절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강대상의 세 번째 촛불을 밝힌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절기를 여러분들께서는 무엇으로 채우고 계십니까. 여전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안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국민들의 앎에 대한 욕구와 범죄의 처벌에 대한 바람들이 건강하게 이루어지지 않자 국민들의 분노가 김이 새지 않는 압력밥솥처럼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터뜨리거나 포기해버린다는 이 두 가지 기로에서 어떤 길이 옳은가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비춰보는 이 시간, 나의 외면과 내면을 뒤흔드는 일상을 어떻게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지 말씀에서 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중점과 저자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야고보서입니다. 야고보서는 신앙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방식 혹은 태도에 관해 잘 이야기해 줍니다. 구원받은 자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 서신으로 보면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복음서의 산상수훈이 자주 소개되고 대표적인 지혜문학인 잠언의 교훈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본 서신의 저자는 본문 1장 1절에도 잘 나와 있듯이 ‘야고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이 여러 개 등장합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마 4:21),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막 6:3),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 10:3; 27:56),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눅 6:16) 등이 있습니다. 이 네 명 가운데 마지막 두 사람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는 성경에 그들의 이름 외에 특이할 만한 사항이 없습니다. 앞에 거론된 두 명의 야고보가 문제인데,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제이며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일찍 순교를 당했습니다(행 12:2, AD 44년경). 야고보서는 바울의 서신을 행위라는 측면에서 강조한 책으로 보기에 바울서신보다 후대의 작품으로 알려진 본 서신의 저자가 바울보다 먼저 죽었다는 것은 정황상 맞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도 이 야고보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수장을 지내기도 했기에(행 1:14; 고전 15:7) 본 서신을 기록할 만한 충분한 신앙과 지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행위다

 

이러한 야고보서의 전반적인 이해를 가지고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인 야고보서 5장 7-12절은 성도의 ‘인내’와 ‘소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가 쓰여 질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많은 박해 가운데 있었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해를 피해 이방 땅으로 흩어지는 성도도 있었지만 당시 로마 황제 숭배 사상이 성행하는 곳이 그들이 흩어진 이방 땅이었기에 배교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향해 소망 가운데 인내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7절에 농부의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며,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7).” 야고보는 성도들이 인내를 가질 것을 이야기하며 농부의 비유를 듭니다. 저는 여름에 몇 번 농촌 활동(농활) 다녀온 것 말고 농사를 지어본 적은 없습니다. 사람에게도 그러하겠지만 식물에게도 태양과 비와 바람은 없어서는 안 될 자양분입니다. 특히 적절한 때의 비가 중요할 텐데, 농부에게 비는 하늘의 기운, 하늘의 때에 맡길 수밖에 없는 농부 본인의 손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농부들은 하늘을 벗과 스승 삼아 농사일을 합니다. 그들은 기다리고 바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다린다는 것도 하나의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침묵하거나 가만히 있는 상태를 보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말하곤 합니다. 작가 정희진은 침묵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침묵은 독자적인 실체, 능동적인 완전한 세계다. 침묵과 말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그러므로 침묵하지 못하는 것은 말을 못하는 것이다.” (<침묵의 세계>에 관한 글 中) 

 

조금 어려운 이야기긴 합니다만 간단히 말해 침묵도 또 하나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신뢰와 훈련이 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이어서 8절을 보면 야고보는 마음을 굳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주님 오실 때가 가까이 왔다며 말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대부분의 저자들은 종말론적인 신앙 가운데 살았습니다. 곧 오실 주님, 다시 오실 주님을 늘 기다렸고 그 기다림을 성도들과 나누었습니다. 야고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지금의 억울함과 괴로움, 핍박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으로 곧 끝날 것임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하나님을 믿었던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신앙의 요소이자 바람이었습니다. 지금의 고난이 곧 끝날 거라는 기대가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내게도 합니다. 

 

서로 원망하지 말 것과 예언자들을 본보기로 삼을 것

 

또한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 어려움의 이유를 찾아보고는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도 자신들이 핍박 받는 원인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교회 안과 밖의 사람들을 원망하게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은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곳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야고보는 서로 간에 오해와 갈등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원망하지 말기를 바랐습니다. 심판하실 분이 이미 문 앞에 서 계시다는 말은 서로 간의 원망이 중요치 않은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야고보는 지난 시절의 예언자들이 겪었던 고난과 인내를 본보기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구약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언자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요엘, 아모스 등이 있습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오듯이 그들이 활동하던 시대는 백성들의 죄악이 짙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그들의 메시지는 백성들에게 잘 수용되지 못했고 그만큼 그들의 신변은 위험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삶의 몫을 끝까지 살아냈습니다. 그런 삶을 살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 끝까지 인내하며 자기 몫을 살아냈습니다. 

 

인내, 모든 것의 하나님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그런데 한번 솔직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 어렵고 힘든 상황을 그저 인내하라고만 하는 이 말씀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십니까? 교회 안의 인내를 강조하는 이 말씀에 어떤 거부감이 들지 않으십니까? 저 또한 그러합니다. 그래서 인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인내하라는 말이 과연 어떤 행동도 취하지 말고 자신의 몸과 마음이 황폐해져 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라는 뜻인가 하고 말입니다. 

 

최근 다시 읽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책을 보면 이러한 글귀가 나옵니다. 성인과 아이의 양면성을 지닌 데미안은 주인공인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네 안에 있는 것은 그걸 벌써 알고 있어.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116).” 이 대목에 저의 시선이 멈췄습니다.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이 말이 현재 나와 함께 하고 계시고 지금까지 함께 계셨던 하나님께로 이끌어 갔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 늘 나와 또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강렬하게 느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야고보가 말하는 ‘인내’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내라 함은 그저 고난의 시간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의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신 그 하나님의 ‘앎’과, 모든 것을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동력(힘)’과,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하나님의 ‘가능성’을 지닌 채 사는 것이 ‘인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동감 있게 살아있는 상태가 바로 ‘인내’인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과 내가 일치를 이루며 살 때 현재의 위기와 고난과 어려움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환난을 넘어서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영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과 일치를 이룸

 

물론 그렇게 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데미안> 뒷부분에 이런 글귀도 나옵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p.129).”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온 지난 삶의 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지난 삶으로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바람을 아시는 거룩한 영께서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이것이 ‘인내’하는 가운데 ‘소망’을 갖게 되는 바람직한 신앙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은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혼란스러운 시국과 또 그와 무관할지라도 각자의 삶에 드리워진 힘겨운 일들 속에서 가슴 뛰는 ‘인내’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시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해내시는 하나님과 함께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고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빛이신 주님이 늘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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