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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한 울타리의 사람들

20160424 쓰임교회 주일설교

 

한 울타리의 사람들

 

<사도행전 11장 1-10절, 18절>

 

1. 사도들과 유대에 있는 신도들이,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2.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3.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 하고 그를 나무랐다.

4. 이에 베드로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을 차례대로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5.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나는 황홀경 가운데서 환상을 보았는데, 큰 보자기와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가 끈에 매달려서 하늘에서 드리워져 내려서 내 앞에까지 왔습니다.

6.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땅 위의 네 발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있었습니다.

7. 그리고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왔습니다.

8. 그래서 나는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된 것이나, 정결하지 않은 것을 먹은 일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9.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하는 음성이 두 번째로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10. 이런 일이 세 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서 모든 것은 다시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18.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 하고 말하였다.

 

[Lumix gx9 / 20mm]

들뜸과 차분의 공존, 4月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람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봄의 계절, 4월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봄기운 마음껏 만끽하고 계신지요? 그런데 정말 봄은 봄인 게, 어느 장단에 맞춰 옷을 입어야 하고 또 마스크와 우산은 언제 준비해야 하는지, 날씨의 변덕이 정말 심한 것 같습니다. 

 

사실 4월이 주는 의미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따뜻한 봄기운을 기대하며 마음을 가볍게 하고 싶은데, 찬바람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4월16일 세월호 참사와 4월19일 민주화 혁명 등이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들뜨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4월은 들뜸과 차분함이 공존하는 달인 듯합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여행

 

부활절 다섯 번째 주를 보내고 있는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은 사도행전 11장입니다. 사도행전은 여러분께서 잘 아시다시피, 누가복음 24장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저자는 누가복음의 저자와 동일한 의사 누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선교활동의 중심인물은 두 명인데, 한 사람은 ‘베드로’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초반에는 베드로에게 초점을 맞췄다면 후반부에는 그 초점이 바울에게로 넘어갑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1장은 초반인 ‘베드로의 선교활동’에 관한 부분입니다. 

 

사도행전 11장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할례를 받은 사람들 즉, 보수적인 유대정신을 가지고 있던 예루살렘 성도들로부터 질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향해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3).”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왜 당신은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소?’라는 말과 같습니다. 왜 정통에서 벗어난 자들과 어울렸냐고 취조했습니다. 

 

오늘 본문 앞 장인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이방인이었던 고넬료를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쳤었습니다(행 10:1-48). 이 사실을 안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베드로는 해명을 해야 했습니다. 사실 21세기에는 이방인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한 선교는 당연한 것입니다. 뭐,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그 믿음도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사도행전이 쓰여 졌던 그 시기에는 이방인이 기독교인이 되려면 먼저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된 후에야 비로소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의 이방인 선교여행으로 기존의 전도방식들이 완전히 깨지게 된 것입니다(조경철, <신약성서가 한 눈에 보인다>, p171). 할례를 받지 않은 무할례자들도, 또 유대인이 되지 않고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게 됐습니다. 당시 이 사건은 정말 엄청난 혁명의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의 황홀경 환상

 

이제 본문 5절에서 베드로는 그가 겪은 경험을 차례대로 이야기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약 55km)에 있는 지중해 항구도시인 ‘욥바(Joppa)’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황홀경(ecstasy) 가운데 환상을 보게 됩니다.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자기 앞에 내려앉았습니다. 커다란 보자기 네 귀퉁이에는 끈이 매여져 있었습니다(5). 베드로가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땅 위의 네 발 짐승과 들짐승들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있었습니다(6). 그 때 한 음성이 있었는데, ‘이것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이었습니다(7). 그러자 그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자신은 속된 것이나, 정결하지 않은 것을 먹은 일이 없다며 이를 거절했습니다(8).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응답(9)이 왔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되고 나서 모든 것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10). 

 

본문 6절에 등장하는 ‘네 발 짐승, 들짐승,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을 먹지 말라는 이 규례는 ‘레위기 11장’에 나옵니다. 유대교 전통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규례를 당연히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환상 속에서 이 규례가 파기 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에 뭔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해당되진 않지만, 베드로는 이어서 가이사랴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어떤 집을 방문하게 됩니다. 뒤의 이야기로 추측해 보건데, 여기서 어떤 사람은 아마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그 집에서 베드로는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고, 성령이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15). 베드로는 그 당시를 회상하며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말했습니다(16). 그러고 나서 성경은 핵심적인 한 문장을 기록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18)

 

혁명적 사건인 베드로의 경험

 

사실 당시의 사도행전 말씀은 엄청난 혁명의 말씀과도 같았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경험은 제한적이었던 하나님 역사의 경계선이 허물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이제 이방인을 향한 선교와 유대인을 향한 선교의 경계가 없어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경험했던 두 가지의 사건, 즉 레위기에서 부정하다 여겨지던 동물이 이제 그렇지 않게 되었고, 말씀을 듣는 사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성령이 임하는 이 두 가지의 사건으로 모든 사람들은 같은 위치에 올라서게 됩니다. 인종과 성별에 따라 극심한 차별이 있던 당시, 이 평등의 말씀은 실로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경계선을 허무는 하나님의 역사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교회 안과 밖을 경계선 삼아 나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은 원래부터 모든 인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향한 것입니다. 그 외의 백성들은 성경에서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와서 그 관심의 대상을 넓히신 건가? 구약의 시대와 성경 이전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사랑은 온 인류를 향한 것은 아니었나? 이런 생각들 말입니다. 

 

이 지점이 성경을 읽는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성서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 가능한 ‘생활 지침서’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쓰여 졌고, 유대인들의 삶과 신앙을 중심으로 쓰여 졌기에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있진 않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점과 시선’입니다. 성경을 기록했던 저자의 시선과 또 이야기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정황을 볼 줄 아는 관점과 시선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적 예수학자인 크로산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실험 프로젝트로서 선택되었는데, 그 이유는 만일에 한 민족조차 정의를 구현할 수 없다면, 모든 민족들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존 도미닉 크로산,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p121). 이것도 성경을 보는 하나의 관점이자 시선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아무튼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누가 봐도 이스라엘 중심적인 이 하나님의 역사가 이방인에게까지 활짝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또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이방인’이 누구라고 생각되십니까? 단순히 교회 밖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즉각적인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그 판단의 권한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은 감정을 동반할 때가 많고, 우리의 이성은 자신이 경험한 것 외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하지만, 우리의 손과 발은 모든 인간관계의 경계를 허물어야 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보는 눈을 갖는다면, 우리의 몸은 자연스레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들을 우리 스스로 속되거나 정결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한 울타리’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하나님이시라면, 생명을 부여 받은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한 주간, 너와 나, 우리와 그들의 논리를 넘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창조의 ‘한 울타리의 사람들’임을 잊지 않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 4월의 봄을 맞아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게 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봄기운을 마음껏 만끽하게 하시고, 4월의 아픔 또한 잊지 말고 잘 간직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유대인들만을 위한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위한 하나님이 되심을 보았습니다. 원래부터 사랑의 경계가 없었던 당신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 또한 각자의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그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이 한 울타리의 사람들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자꾸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보다 앞설 때, 우리 삶의 조급함을 늦춰주시고 당신과 발맞추어 걷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작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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