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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건

20190217 쓰임교회 마지막 주일설교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건

 

<예레미야 17장 5-8절>

 

5. "나 주가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6. 그는 황야에서 자라는 가시덤불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이 살 수도 없는 땅, 메마른 사막에서 살게 될 것이다." 

7. 그러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8.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뿌리를 개울가로 뻗으니, 잎이 언제나 푸르므로,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다. 그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하길 빕니다. 

 

요즘 행복하십니까? 여러분께서는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행복’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행복’이란 ‘특별한 어려움 없이 매일 평안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솔직히 지금도 계속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있긴 합니다만, 그런데 참 이상한 건 계속 이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그러면서 자꾸 드는 생각이 뭐냐면 ‘내가 뭔가 잘 못 살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남들은 아무 문제없지 다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왜 나에게만 어떤 어려움, 고통들이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경험이 쌓여가고 또 사람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된 사실은 모양과 형태는 다르더라도 누구나 크고 작은 어려움, 고통은 있어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작가 ‘괴테’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하죠. "화창한 날이 계속되는 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없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일 수도 있는데, 그는 ‘행복’이란 억제되고 억압되어 있던 욕구가 갑자기 충족되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상태는 엄밀히 말해 일시적인 만족감을 줄 뿐이라고 했습니다. 

 

쓰임교회에서의 희로애락(喜怒哀樂)

 

제가 왜 설교 서두부터 이런 말씀을 드리나하면, 사람은 불행을 경험하지 않고는 절대로 행복이 뭔지 알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지그문트 바우만). 이미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가 이번 주일을 마지막으로 목회지를 옮기게 됩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첫 예배를 드린 날은 2015년 4월12일(일)입니다. 약 4년 정도 성남동지방 쓰임교회에 몸을 담고 있었는데요. 

 

1. <가버나움>: 혹시 이곳에서 드린 가버나움 속회의 첫 예배가 언제쯤인지 기억나십니까? 제가 기록해둔 것이 옳다면 2015년 6월26일(금)이었습니다. 제가 쓰임교회에 오고 두 달 정도가 지난 후입니다. 그 때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졌고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젠 더 밀착하여 뵙게 됐습니다. 지긋지긋하신 건 아니시죠? 

 

2. <하늘소망교회>: 혹시 하늘소망교회가 쓰임교회와 연합으로 드린 첫 마중물 예배가 언제쯤인지 기억나십니까? 제가 기록해 둔 것이 옳다면 2016년 6월26일(일)이었습니다. 제가 쓰임교회 오고 1년이 조금 지나고 나서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인연이 오늘까지 이어졌습니다. 

 

 

솔직히 제 목회여정에 있어 다른 교회(청파교회) 부목사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것이 올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부랴부랴 마무리를 하는 가운데 이곳에서 그간 무엇을 했고 무슨 일을 경험했으며 무엇을 느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곳에 있으며 때론 어떤 ‘희망’과 ‘가능성’들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무엇이 더 있었나를 생각해보니, ‘절망’을 경험한 시간, 자신의 ‘한계’와 ‘어둠’을 경험한 시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은 ‘불행’을 경험하지 않고는 절대로 ‘행복’이 뭔지 알 수 없다는 말이 생각 난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 새로운 목회지(청파교회)에서 맞이할 삶이 모든 순간 행복할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 있으면서 느꼈던 어려움을 발판삼이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영성지도를 받으며, 평소 흔하게 들었던 말이지만 새롭게 다가왔던 질문이 뭐였냐면, ‘내가 어디에 있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느냐’는 말이었습니다. 이 질문 앞에 섰더니, 제가 믿던 하나님이 많은 부분 추상적인 이미지의 하나님이었고 때론 어떤 감정 안에 갇혀 있는 분이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서의 말씀이 저를 이 질문 앞에 다시 세우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듯이, 구약의 역사는 ‘돌아섬’과 ‘회복’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셨는데, 그 축복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우상을 세워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고 또 그들을 아끼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시고, 이 메시지를 들은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그 관계가 회복되는 과정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결국 최종적으로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의한 이스라엘의 멸망 즉, 남유다의 멸망을 전합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을 의지하는 자가 받을 복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입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는 황야에서 자라는 가시덤불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이 살 수도 없는 땅, 메마른 사막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뿌리를 개울가로 뻗으니, 잎이 언제나 푸르므로,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다. 그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의 힘을 믿는 자를 어떻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저주’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황야의 가시덤불 같아서 좋은 일을 볼 수 없고, 메마른 사막에서 살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어떤 대우를 받는다고 했습니까?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언제나 잎이 푸르고 무더위나 가뭄이 와도 열매를 맺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 건네는 말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주님을 잘 믿고 의지하며 살고 계십니까? 이 사실을 가장 잘 확인하기 위해서는 역시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생각’은 자주 우리를 속입니다.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잘 믿고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우리는 망설이며 고민과 갈등에 빠지게 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아니면 반대로 어떤 고민과 갈등도 없이 바로 내 뜻을 앞세운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라도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이 ‘평소 우리가 만나는 사람’, ‘우리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마저 의지하지 말라는 말은 아닐 겁니다. 본문이 말하는 ‘사람을 의지한다는 말’은 돈이나 권력, 쾌락만을 주는 대상을 좇지 말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인양 따르게 될 때 주어질 결과가 바로 ‘저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경험되는 ‘행복’

 

여러분, 뻔한 일 또는 늘 해오던 일을 통해서는 자신이 정말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지 혹은 주님이 내 삶에 어떤 선물을 주시고 주셨는지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매일 반복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금방 적응하는 동물이기에 익숙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에는 자신과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워집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상황을 스스로 변화시키거나 혹은 예상치 못한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특별함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서두에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물었었습니다.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행복’이란 역경이나 불안 등 어려운 도전을 극복할 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순간적으로 경험되는 것이 ‘행복’이 가진 의미입니다. 

 

4년 간 이곳에 있으며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많이 고독했습니다. 그 고독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주 돌아보게 되었고 더불어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도 이곳에 있었기에 해볼 수 있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특정한 상황이 저 스스로를 새롭게 보게 하는 동기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용기를 내십시오

 

저는 이제 새로운 초대로 나아갑니다. 쓰임교회에서는 홀로 있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됐다면, 앞으로는 많은 이들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대가 되지만 한편으론 떨리고 긴장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용기’를 내지 않으면 ‘성숙’과 ‘자기 확장’의 기회는 잘 열리지 않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즘 여러분의 삶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할 일들이 있으십니까? 소설 속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한번 들어보시죠. “신께선 매일 우리에게 태양을 허락하십니다. 신께서는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순간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척하고, 오늘은 어제와 같은 날이고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을 거라 여깁니다.” (파울로 코엘료,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문학동네, p.28-29) 

 

여러분의 매일은 어떠하십니까? 오늘도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지내십니까? 새로운 시작이 내 앞에 놓여있건 아니면 내게 어떤 무거운 고민이 있건 또는 내가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고 한다면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내가 선택한 일, 내게 일어난 일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현 위치를 알려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살피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어떤 선택이든 ‘용기’를 내십시오. 내 마음의 면밀히 살피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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