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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고난주간]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

20210401 청파교회 고난주간 설교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

 

<요한복음 18장 36-40절>

 

3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37.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빌라도가 예수께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38.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 사람들에게로 나아와서 말하였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39. 유월절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소. 그러니 유대 사람들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소?"

40. 그들은 다시 큰 소리로 "그 사람이 아니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하고 외쳤다. 바라바는 강도였다.

 

 

제4복음서로의 초대

 

안녕하세요. 고난주간 네 번째 설교를 맡은 OOO입니다. 오늘도 로완 윌리엄스의 책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에 등장한 예수의 이야기, 심판대에 선 예수의 수난 이야기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이야기부터 들어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수난 이야기에 무게를 실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수께서 사형 선고를 받고 심판대(십자가)에 달리기까지의 그 긴박함과 혼란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하지만 복음서들 가운데 요한복음이 차지하는 위치는 좀 특별합니다. 요한을 제외한 세 복음서는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유사점이 많은데 비해, 요한복음은 세 복음서와 일부분만 일치하고 내용이나 구성 면에서 많이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는 관점이 서로 비슷하다 하여 공관복음이라 부르고, 요한복음은 따로 떼어 제4복음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수난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조금 차이를 보입니다. 예를 들어 1.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가 재판에 넘겨지고 선고를 받는 과정에 유대 사회 지도층이 깊이 관여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의 예수 수난사는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반영하는 정도에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하지만 2. 요한은 어느 정도 자기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제에 부합하는 것처럼 실감 나게 묘사합니다.

 

물론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이 서로 차이가 있다고 해서, 특정 복음서가 더 가치 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로완 윌리엄스도 요한의 특수성을 말하기보다, 복음서 저자들의 여러 관점 가운데 하나로 요한도 바라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부분은 복음서 저자들이 함께 관심 갖고 있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예수의 정체성과 또 그를 믿고 있는 우리를 향한 질문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입니다. 이 부분에 집중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왕: 진리를 증언하는 자

 

요한은 정체성에 관해 묻습니다. 믿는 이로써 우리의 정체성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는 암묵적으로 묻습니다. 예수와 빌라도의 만남부터 살펴보자면, 요한복음 18장 28절에 이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만납니다. 먼저 여기서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은 빌라도의 재판 장면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일반 대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계급, 즉 사제 계급을 대표한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유대 사회 전체를 악마화하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께 먼저 묻습니다.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18:33) 이 질문은 간격을 두고 37절에 한 번 더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 로마 제국 아래에서 왕이라는 개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힘, 군사, 영토와 같은 것이 왕 됨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입을 통해 증언된 왕은 제국주의로서의 왕이 아닌 진리를 증언하는 자(37)로서의 왕입니다.

 

진리라는 말은 요한복음 8장에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8장 31-32절은 말합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많이 들어본 말씀일 겁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참 제자가 되고 싶으면 그리고 진리로 자유하게 되고 싶으면, 자신의 말을 집으로 삼으라 말합니다. 로완 윌리엄스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예수의 말과 행동에 귀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된다면, 그렇게 그의 말과 행동에 머무르게 된다면 우리는 진리로 자유하게 될 거라고 말합니다.

 

진리 따를 때의 명과 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잘 되지 않는다는 것과 진리를 따를 때 주어지는 결과도 그리 가볍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의 고별장면을 보면 그에게 머지않아 고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의 그림자가 우리를 진리로 향하게 하다가도 다시 멀어지게 만듭니다. 진리를 따른다는 건 예수가 느낀 무력감과 결과적으로 죽음까지도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죽음의 연결고리는 십자가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가까워집니다. 진리와 죽음은 십자가에서 마주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는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예수 스스로도 그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그렇기에 진리와 함께하는 삶은 위협이나 위험을 감내하며 죽음마저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고난주간에 걸맞은 무거운 이야기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이 이렇게 험난하기만 하다면, 매번 어둡기만 하다면 굳이 그 길을 가야만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건 지극히 당연한 반응입니다. 속된 말로 예수를 믿을 때 좋은 점 한 가지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 좋은 점이라는 것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의 욕망 충족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를 따를 때 좋은 점은 다시 말해 진리를 쫓을 때 우리가 바랄 수 있는 보상은 그늘 너머에 있는 빛어둠 너머에서 비추는 빛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완 윌리엄스는 이 네 번째 단원의 제목을 요한-결단을 요구하는 빛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예수 자신이 아버지를 보았듯이, 예수와 함께하는 이들도 아버지를 보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빛을 보상으로 받는다는 말은 아버지를 본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일! 그것이 진리를 따르는 자가 받게 될 보상인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께서 예수께 보이신 이 영광은 홀로 누리기 위한 영광은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표점은 이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고 또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가 증언하는 왕

 

예수와 빌라도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자신의 왕(왕권)됨은 로마가 보여준 왕의 개념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만약 자신이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는 왕이었다면 “부하들이 자신을 위해 싸워,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36)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자신을 왕이라고 칭한 예수는 자신의 왕 됨을 어디서 발견했던 걸까요? 우리는 그가 왕이라는 사실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의 왕 됨은 우리의 눈에 지극히 어리석어 보이는 길로 증명됩니다. 만일 제자들이 세상의 셈법으로 예수를 지키려 했다면, 예수께서 부정하신 승-패의 논리에 다시 빠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일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방식은 세상의 기준에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어리석고 미련함이 예수가 말하는 왕권인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진리

 

여러분, 세상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세상을 잘 몰랐을 때, 이 세상은 명확히 구분되는 곳이었습니다. 선악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들을 경험하고 내 안의 다양한 욕구-욕망들을 발견하고 나자, 콘크리트 같았던 개념이 흔들리게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세상에 절대적인 옳음과 절대적인 틀림이란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믿는 일도 점점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것도 또 우리가 살아내려는 진리도 (우리 입을 통해) 발설되는 순간 그것이 예수의 길에서 멀어지는 걸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말의 부질없음이 여기에 해당될까요. 이승우 작가도 그의 책 <사랑이 한 일>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무엇보다 사랑은 잘 말해져야 한다. 말하지 않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해져야 한다.”(112)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말이 발음되고 나면, 그것은 결코 완전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실망스런 결과를 낳으며, 매혹은 상실되며, 의미의 모든 탄생은 유산이다.”(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05, p.102)라고 말했습니다. 사랑 고백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되겠지요.

 

결국 진리란 의도를 갖고 드러내려 할 때는 숨겨지고, 우리를 옭아매는 집착에서 놓일 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드러내려 할 때 드러나게 되는 것이 바로 진리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더 헌트, The Hunt>

 

잠시 영화 얘기를 해보려는데요. 덴마크 영화 <더 헌트, The Hunt>라는 영화 보신 분 있으신가요? 안 보신 분은 있어도 한번 보신 분은 잊을 수 없는 영화일 겁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주인공 루카스는 아내와 이혼한 뒤 고향에 내려와 유치원 교사로 일하게 됩니다. 성실하고 친절한 루카스는 새로운 터전에서 새 삶을 꾸려나갑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엄청난 곤경에 빠지게 되는데, 그 발단은 자신의 죽마고우였던 친구의 딸인 클라라에 의해 발생합니다. 다섯 살 배기인 이 클라라는 자신이 다니는 유치원 원장에게 루카스가 자신을 성추행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소문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에 퍼집니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어른들은 루카스와 그의 아들에게 위협과 폭력을 가합니다. 클라라는 뒤늦게 "내가 바보 같은 말을 했다"라고 어른들에게 진실을 자백하지만, 오히려 어른들은 어린아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 속에 있는 기억을 지우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루카스는 점점 궁지에 몰립니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클라라의 말은 기정사실화 되고 경찰의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도 전에 학부모들에 의해 루카스는 확실한 범죄자로 낙인찍힙니다. 학부모들은 루카스의 이혼한 아내와 아들에게까지 연락을 해 그를 조심하라고 경고하기에 이릅니다. 한 순간에 루카스를 둘러싼 모든 사회적 관계들이 송두리째 뽑혀 버립니다. 진실은 관객들에게만 드러납니다. 영화에 등장인물들은 철저히 이성적 판단 속에 진실만을 왜곡한 일이 발생하고 만 겁니다. 모두가 옳다고 여기는 판단 속에 진실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요?

 

답답한 심정이 가득 밀려오는 영화 <더 헌트>는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는 세상, 섣부른 판단이 한 사람을 고립시키게 되는 상황, 잘못된 확신이 얼마나 많은 갈등과 소외를 낫는 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진리는 스스로 드러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예수를 따르는 일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도 있는 것입니다. 진리란 언어로 전해지기 어렵다는 사실 말입니다.

 

진리를 따를 때의 어려움

 

여러분은 정말 진리를 따르고 싶으십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진리는 그리 반가운 손님은 아닙니다. 저자 요한은 진리가 우리를 분명 자유하게 하지만, 예수를 따를 때 위험이 동반될 수밖에 없음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진리는 우리에게 안전과 만족을 거부하는 엄격함을 지니고 있음 또한 전하고 있습니다.

 

1. 진리를 좇는 건 예수께서 사셨던 삶의 방식을 닮는 걸 말합니다. 그는 폭력과 경쟁을 앞세운 세상에 침묵과 어리석음, 미련해 보일 법한 태도로 맞섰습니다.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그 방식 합류하라는 요청이기도 한 것입니다.

 

2. 예수께서는 경계를 없애셨을 뿐 아니라 편안함에 오래 머물러있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를 따르는 자들도 순례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능한 모든 곳을 자신의 집처럼 여기지만 동시에 어느 곳도 자기 집으로 여기지 않기를 예수께서는 바라셨습니다. 그것이 좋아서이기보다는 그래야 치우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에 불만족이 찾아올 때

 

고난주간에 나눈 이야기라 그런지 오늘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무겁고 어둡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산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불만족을 안고 사는 사람을 그리 나무랄 필요도 없습니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은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열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이 불만족스러운 현실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무언가에 열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이기도 합니다.

 

1. 만일 나의 현실이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하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기도를 하게 되나요? 지금 현실을 극복해야만 하는 현실로 이해하거나 진짜 현실이 아니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현실을 외면하는 도피적인 삶을 살거나, 매 순간 불만과 불평에 붙들려 살아가게 됩니다.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도 답은 아닙니다만 더 조심해야 할 상황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현실의 상황을 외면하려는 태도입니다.

 

2. 그리고 이런 경우도 아주 비일비재하게 발생합니다. 변화를 도모하기 위한 의로운 마음에 또는 교회가 바로 섰으면 하는 마음에 속히 교회가 태도를 바꾸기를 바라는 것 말입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견해와 교회에 제기하는 질문들, 현 교회에 대한 우리의 비판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여기게 됩니다. 어떤 마음에 강하게 사로잡히면 이런 태도를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완 윌리엄스는 말합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교회 현실에 몸을 담고 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자신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말을 듣지 않는 이들과도 관계를 맺으며 함께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지나친 의로움에 사로잡히는 것도 예수의 길에서 벗어난 길일 수 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겠습니다.

 

은총과 신뢰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분의 도움을 통해서만 우리는 예수의 길에 설 수 있습니다.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그리고 길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는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은총과 신뢰가 내 안에 가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과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복음서들은 우리를 향해 심판하는 곳에서 내려와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받는 곳에 서라고 이야기합니다. 심판하는 심판자의 자리에 서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심판받는 자리에 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와 함께 심판대에 서지 않으면, 예수가 진정 누구인지 발견하지 못하고 또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이란 삶의 중심을 우리 자신에게서 예수에게로 옮기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예수가 선 자리에 자신을 세워보는 고난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기도

 

예수여,
우리 자신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소서.
이 세계가 하는 어떤 말이, 이 세계가 하는 어떤 일보다
당신 안에서 볼 수 있는 진리와 사랑에 집중하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살롱에서 나누는 말씀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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