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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수요집회] 신앙의 기쁨 재발견

20191204 청파 수요집회 설교

신앙의 기쁨 재발견

<마태복음 3장 1-12절>

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2.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였다. 
3.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4.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5.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6.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7.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8.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10.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12.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기다림의 어려움

안녕하세요! 지금 모든 교회는 대림절 두 번째 주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김목사님께서 교회력 순서에 관해 말씀해 주셨는데요. 교회는 벌써 새로운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2020년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 시작을 알리는 절기가 바로 ‘대림절’이었습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대림절은 예수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이라는 것이 어느 때보다 크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이라고 하는 말엔 참 여러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기다림 하면 어떤 게 떠오르십니까? 어떤 기다림이든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다림이라는 것 속에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이걸 잘 지키자니 생각보다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짓궂으세요.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은 하나님만 아신다며, 재림의 때를 알려주지 않으세요(마 24:36-44). 

뭔가를 기다리는 일은 늘 어려운 법입니다. 주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시인과 가수들이 이 ‘기다림’에 관해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제 휴대전화에 기다림에 관한 내용의 노래가 있나 좀 뒤적거려봤는데, 제목 자체도 <기다림>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잠깐 들어볼까 하는데요.  

<ING>라는 영화에 나온 노래인데, 생소하고 좀 축축 처지는 노래지만 한번 편하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노래 속 주인공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신을, 마치 ‘부서진 작은 배 위에 누워있는 모습’으로 상상하고 있습니다. 이승렬의 <기다림>입니다. 

미칠 것 같아 / 기다림 내게 아직도 어려워 / 보이지 않는 니가 미웠어
참을 수밖에 / 내게 주어진 다른 길 없어 / 속삭여 불러보는 네 이름 
어두운 바다를 떠돌아 다니는 / 부서진 조각배 위에 / 누인 내 작은 몸 
언젠가 그대가 날 / 아무말 없이 안아 주겠죠 / 그 품안에 아주 오래도록
나에게 지워진 시간의 무게가 / 견디기 힘이 들도록 / 쌓여간다 해도
언젠가 그대가 날 / 아무말 없이 안아 주겠죠 / 그댄 나를
아무말 없이 안아주겠죠 / 그 품안에 아주 오래도록   

기다림이라는 감각

그런데 기다림이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것은 맞는데, 이 기다림이 왜 중요한가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한 영성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을 ‘사막’에 비유했는데요. 그는 ‘사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화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사막에서 가장 긴급한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막은 계획을 세우고 마감 시간을 지키며 긴급한 속도로 무언가를 착수하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반기지 않습니다. 대신에, 사막은 샌들을 벗고서, 천천히 맨발로 걸으며, 모래의 타는 듯 함과 모래가 발바닥을 어루만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환영합니다. 

당신이 사막을 정복하려는 야망이 없다면, 당신이 책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일어나는 일들을 고요히 기다릴 수 있다면, 사막은 당신을 침입자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당신에게 그 비밀을 보여줄 것입니다. 

알렉산드로 프론자토, <모래위에서 묵상>

모래는 계획을 세우고, 마감 시간을 지키고 또 빠른 속도로 뭔가 하려는 사람들을 그리 반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어요. 대신 누굴 환영하느냐? 신발을 벗고 맨발로 천천히 걷는 사람, 그리고 발의 촉각으로 모래를 느끼는 사람을 환영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삶의 비밀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잘 기다리는 사람’이 ‘잘 깨달을 수도 있는 법’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기다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인데, ‘잘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주어지는 선물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대림의 절기를 더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라도, ‘기다림이라는 감각’을 아주 예민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의 회개, 몸의 회개

오늘 본문은 이 맘쯤 되면 항상 등장하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요한의 세례를 받는 이야기인데요.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유난히 도드라지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회개입니다. 이 회개라는 말은 늘 우리를 불편하게 하면서도, 그렇다고 피하기도 어려운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로 ‘회개’를 생각할 때 무엇부터 떠올리게 되냐면, 마음의 회개를 떠올리게 됩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변화부터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마음의 변화 없이 어떤 변화도 오긴 힘듭니다. 모든 변화는 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데요. 사람은 마음에 와 닿지 않은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 걸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런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의 변화만큼 중요한 변화가 몸의 변화라고 말입니다. 회개의 최종 단계는 ‘몸의 회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싶으실 텐데요. 오늘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모

오늘 함께 읽은 마태복음 3장은 2장과 약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2장에 등장한 예수는 아기의 모습인데, 3장에 넘어오자 부쩍 성장한 모습을 보입니다. 아마 미태복음을 쓴 저자가, 중점적으로 다루고 싶은 이야기가 후반부에 있어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건너뛰었습니다. 

부쩍 성장한 예수는 가장 먼저 누구를 만나게 되냐면,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은 마태복음 3장에 첫 등장하자마자, 다짜고짜 무언가를 외치고 다닙니다. 대체 이 요한은 뭐라고 떠들며 다니던 중이었나요? 회개에 대한 선포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죠.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말입니다. 요한은 뭔가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회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한이라는 인물은, 투박한 말투처럼, 생김새도 투박합니다. 막 우락부락해요. 성경은 그가 ① 어떤 옷을 입고 있었다고 했나요? 낙타 털 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무스탕을 입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는 야생의 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리고 요한의 ② 허리에는 뭐가 있었냐면, 가죽으로 만든 띠가 있었어요. 그가 찬 ‘가죽 허리띠’는 그의 야성뿐 아니라 그의 단호한 성격, 어떤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이 ③ 뭘 먹었다고 성경은 말하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었다고 했어요. ➊ 옛날에 저도 부모님을 따라 메뚜기를 잡으러 다녔었는데, 그 시절의 ‘영양식 메뚜기’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자급자족x, 인원적인 것x) 

그리고 또 그가 ➋ 자연의 꿀을 먹어 굉장히 건강했을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는 그야말로 야생의 남자였습니다. 이런 요한과 비슷한 인물이 있긴 있었죠. ‘에서’입니다. 붉은 피부에 온몸에 털이 무성했던 남자! 뭔가, 에서와 요한이 비슷한 느낌이기도 합니다.  

요한의 거친 입담

그런데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말하는데, 사실 외모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 도움을 줍니다. 그 사람이 머리를 어떻게 꾸몄는지, 그 사람이 머리색을 어떻게 했는지, 또 그 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가방을 맺는지가 그 사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외모는 누군가의 신분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 상태 혹은 감정 혹은 기분 등을 보여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요한의 외모는 그의 마음 상태를 어느 정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카리스마 때문인지 몰라도 유대인들은 그에게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다 누구까지 덩달아 나옵니까?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다들 잘 아실 겁니다. 하나님을 믿되, 의식과 형식에 사로잡혔던 이들이었습니다. 본질은 없고 껍데기만 남았던 인물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요한은 그들이 자기에게로 오는 걸 보자, 그들을 향해 심한 욕설을 합니다. 이 부분을 성경은 최대한 온화하게 표현한 것 같은데, 아마 제 생각에 실제로는 이보다 더 심한 욕을 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을 향해 나오는 이들을 향해 뭐라고 했냐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대놓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식으로 말하면, (욕해서 죄송합니다) ‘개의 자녀/멍멍이 자녀/Dog Baby’ 보다 더 심한 욕이었을 거라 예상됩니다. 

부정의 아이콘이 된 뱀 유래

근데 혹시 이런 생각해보신 분, 계신가요? 어쩌다 ‘뱀’은 성경이나 신화에서 ‘부정의 아이콘’이 되었을까 말입니다. 아주 옛날에 들었던 거라 정확한 소문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좀 뜨겁고 편협한 신앙관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산마다 다니며 뱀을 잡아 없앴다는 이야기 말입니다(믿거나 말거나). 참 안타깝습니다. 

아무튼! 역사공부를 하다가 들은 이야기인데요. 뱀이 부정적인 동물이 된 어떤 유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아주 오래전, 인류가 동굴에 살 때가 있었는데, 그 당시 인간에가 가장 위협이 됐던 동물이 바로 뱀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인간을 위협하는 동물은 많이 있었겠지만, 인간이 사는 굴로 들어와 ‘어린 아이’나 ‘사람의 식량’을 위협하는 동물이 뱀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뱀이 지나갈 때, 어떤 소리를 내는지 아시나요? 소리 없이 지나가는 뱀도 있겠지만, 주로 뭔가 스치는 듯, 소리를 내며 지나가죠. “슥~”이란 소리 말입니다. 그래서 왜 ‘어린아이’나 ‘애완동물’이 위험한데 가거나,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할 때, 어른들은 어떤 소리를 냅니까? “슥~”이란 소리를 내죠. 그러니까 이 소리는 인류가 동굴 생활을 할 때부터, 어떤 위협을 감지하기위해 공유했던 ‘소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부정적인 뱀의 이미지라는 게, 뱀의 천성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그들의 생존본능과 인간의 생존본능이 대립해서 생긴 견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파, 사두개파 사람들은 미워해도 ‘뱀’은 너무 미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변화는 반드시 드러난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면요. 세례 요한은 바리새파,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욕 한방을 매긴 다음, 중요한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그는 “회개의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라고 말하며, 10절에 “하나님께서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 부분이 중요한데, 우리가 마음의 회개만으로는 좋은 열매 맺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몸의 회개가 뒷받침돼야 하는데요. 물론 ‘마음의 회개’가 선행되지 않으면, ‘몸의 회개’가 따라오기 어렵습니다. 뭔가 ‘감동’이 있어야, ‘시도’라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회개의 종착지는 ‘몸’이 돼야 하는 게 맞습니다. 그래야 어떤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변하면, 누가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지 아십니까? 주위 사람들입니다. 내가 좋게 바뀌던, 나쁘게 바뀌던, 변화가 일어나면 주위 사람들이 먼저 알아봅니다. 우리는 간혹 이런 일을 목격하곤 하는데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주위 사람들은 도무지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 경우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삶이 차이가 없는 거죠. 변한다고 하는 건,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진짜 중요한 고민은 이것이죠. ‘마음의 회개’는 ‘몸의 회개’로 이어져야 하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잘 할 수 있을까에 관한 고민 말입니다. 너무 결론이 단순해지는 건 아닌가 모르겠는데요. 어제 그 고민의 답을 발견했습니다. 아주 가까이 계신 몇몇 분들을 통해 그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감동이 주는 힘

여러분께서 뭔가를 몹시 좋아했던 기억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무언가에 푹 빠져봤던 적 말입니다. 그게 사람이든, 책이든, 맛집이든, 운동이든, 여행이든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사람이 뭔가에 푹 빠지면 어떻게 바뀌는지 아시나요? 언제 어디서나 자꾸 그 얘기를 하게 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꾸 그 생각이 나고, 그게 너무 좋아서 그 얘기를 입에 달고 다니게 됩니다. 

① 올해 우리 교회에 청년1부가 새로 생기면서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모이게 됐습니다. 사람이 여럿 모이다 보면 당연히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죠. 그중 몇몇 사람은 말하는 걸 참 좋아하지만 반대로 또 몇몇은 조용히 있습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건, 그 조용한 친구들도 자신의 관심사나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벌써 눈빛부터 달라집니다. 

대표적인 예는 최온영이라는 친구입니다. 22살에 미술을 하는 친구인데, 동아리로 밴드의 보컬을 하는 친구이기도 합니다. 그 친구는 평소 청년부 모임 때 매우 조용하게 있다가 조용히 사라지곤 했는데, 갑자기 음악 얘기가 나오거나, 그림 그릴 일이 있으면 눈빛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독특한 음악 취향’을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② 사실 이분들의 실명을 거론할 순 없지만, 요즘 목회실의 이 두 분이 드라마 전도사가 되어 여기저기서 ‘드라마 복음’을 전파하고 계십니다. 지난주 수요 예배 때 들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놈의 <동백꽃 필 무렵>이 뭔지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여기에 ‘복음’이 있다고 할 정도로 전도를 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 저와 목회실의 다른 한 분은 아직 이 드라마를 못 봤는데요. 그래서 엄청난 죄인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근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뭔가 우리의 가슴을 울리면,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그 이야기를 생각하고, 기회가 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게 되는구나”라는 생각 말입니다. 저는 그러면서 자연스레 ‘기독교 신앙’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감동이란 이렇게 힘이 있는 거 구나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내 안의 기쁨

담임목사님께서 한 달 전, 2부 예배 때 이런 말씀을 했었는데요. 기독교인의 수가 자꾸 줄어든다고 걱정들 하는데, 자꾸 기독교인이 주는 이유는 교회가 매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진짜 전도’는 누군가를 내 입맛에 맞게 개종하는 게 아니라, ‘어떤 매력’에 감염되게 하는 거라고 했던 게 기억납니다. 그렇죠. 내가 뭔가가 정말 정말 좋으면, 오히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마지 못 해 하는 신앙생활이 되지 않으려면, 내 안에 신앙생활의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감동이 있으면, 몸의 변화는 자연스레 따라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남은 대림절기 동안, 내 안에는 과연 어떤 기쁨이 있는지, 잘 들여다보는 저와 여러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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