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작가야의 BibleSalon

Salon 205

여백

2024년 10월 27일 일요일 "나는 텍스트의 여백으로 침투해 들어가려고 했다. 여백은 신의 말과 인간의 말이 맞부딪치는 자리이다. 여백은 침묵이 아니라 소란이다. 어떤 말로도 옮겨지지 못해 유보된 말들이 발굴되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공간이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러니까 이 작업은 더 나은 이해를 위해서이지 훼손을 위해서가 아니다." 여백은 엑스트라들에게 마이크를 달아주는 것이다. 여백은 주인공이라고 하여도 말하지 않는 순간에 마이크를 달아주는 것이다. 그들의 침묵에 귀를 기울여 보면 그 침묵은 소란으로 가득 찬 걸 알 수 있다. 여백은 소란이고 침묵은 소란이다. 그래서 말 없고 조용한 사람의 내면은 말 많고 시끄러운 사람만큼 소란스러운 걸 알 수 있다. 이승우 작가는 다른 책에서 말한다...

Salon 2024.10.27

신의 말

2024년 10월 26일 토요일  "말하는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없다. 신이 파악되지 않는 존재인 것은 인간이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한한 신의 말이 유한한 인간의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성서는 완벽하지 않다. 성서를 기록한 저자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시대, 자신의 인식, 자신의 한계에 예속되어 있다. 누구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서는 완벽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달리 방법이 없으시다. 인간에게 말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정도 본래 뜻의 손실을 감내할 수밖에 없..

Salon 2024.10.26

무한함

2024년 10월 25일 금요일  "당신의 무한하신 말씀을 유한한 것으로 만들어주셔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나의 유한한 세계 안으로 들어오되, 내가 살고 있는 유한성의 비좁은 집을 부수지 않고 그 안에서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좋은 기도문을 꾸준히 읽어야 할 이유이다. 칼 라너는 신 앞에서 자신의 가능성과 자신의 한계를 마주한다. 만약 인간에게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면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되고 또 한계가 없다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해진다. 무한한 세계가 유한한 인간 안으로 들어올 때 인간은 버틸 수 없다. 이해할 수 없거나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무한한 것을 유한한 세계에 맞아들일 때는 요청이 필요하다. 무한한 세계가 유한한 내 세계 안에서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말이다. 신..

Salon 2024.10.25

거부

2024년 10월 24일 목요일 "다른 사람의 꿈이 나를 취조하는 근거로 작용할 때, 누가 꾼 것인지 모르는 꿈에 대한 해석이 나의 삶을 휘저으려고 할 때, 외부의 꿈들과 바깥의 해석들이 내부를 흔들려고 할 때, 필요한 것은 귀를 닫는 것이다. 그 현장에서 달아나는 것이다. 말려들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해석자의 입'이 내 삶의 영역으로 파동하며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꿈'을 '타인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견해'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타인을 통한 자기반성은 중요하다. 바로 보게(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겸손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나를 평가하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의 이야기는 거의 새겨들을 말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살면서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을 피..

Salon 2024.10.24

실현

2024년 10월 23일 수요일 "너무 깊이 온종일 집중해서 생각하다보면 꿈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혹은, 꿈의 이야기를 현실 속에, 스스로 재연한다. 꿈의 서사에 암시를 받아 삶을 꾸린다. 삶은 꿈의 복사관이 된다. 파스칼은 인생이 약간 덜 변덕스러운 꿈이라고 익살스럽게 말했다." 꿈이 현실이 되는 일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꿈은 사람들이 '되고자 하는' 꿈이 아니라 '자면서 꾸는' 꿈을 말한다. 어떻게 꾼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는가. 이승우 작가는 그러한 가능성이 생각하는 힘에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생각'은 '생각을 위한' 생각이 아니라 '계속 생각나는' 생각을 말한다. 가브리엘 마르케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의 책 에 이러한 대목이 나온다. "자네는 너무나 군사..

Salon 2024.10.23

생각

2024년 10월 22일 화요일 "미워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면서 미워할 수는 없다. 사랑하기 위해서도 생각해야 하지만 미워하기 위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듯이 미워하는 사람도 닮아 간다. 미워해서가 아니라, 미워하느라 생각해서이다. 상대방을 닮아가게 하는 것은 사랑의 기능이 아니고 생각의 기능이다. 사랑하느라 생각하든 미워하느라 생각하든 마찬가지다. 생각은 그 대상과의 일치를 지향한다. 사람은 생각한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생각은 힘이다. 생각에는 힘이 있다. 그래서 생각은 별것이 아닌 것이 아니다. 생각은 별거다. 사람은 생각에 따라 거듭난다. 좋아하면 닮아간다. 좋아하면 자기도 모르게 좋아하는 사람의 태도나 습관을 닮아간다. 그 사람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Salon 2024.10.22

타락

2024년 10월 21일 월요일 "자네는 너무나 군사정권을 미워하고, 그들과 너무 오랫동안 싸움을 하고, 그리고 그들에 대한 생각을 너무 깊이 해 왔기 때문에 결국 자네도 그들 못지않게 나쁜 사람이 되고 말았어. 그토록 비참한 타락을 겪으면서까지 추구할 만큼 고귀한 이상은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지." 너무 무거우면 가라앉고 너무 가벼우면 날아간다. 날아가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가라앉아도 안 된다. 그런데 굳이 비교하자면 어쩌면 가라앉는 것보다 날아가는 것보다 더 나은지 모른다. 가벼워서 날아가는 것은 보통 자기 자신이다. 항상 1이다. 망쳐도 혼자, 성공해도 혼자이다. 하지만 가라앉는 사람은 어떠한가. 무거워서 가라앉는 사람은 보통 자기 자신에 1이 더해지거나 1 이상이 더해진다. 자기 선에서 끝나지..

Salon 2024.10.22

칼날

2024년 10월 20일 일요일  "깨진 그릇은칼날이 된다.무엇이나 깨진 것은칼이 된다."  깨져서 더 좋아질 물건이 있는가. 있을 리 만무하다. 사람의 마음은 말해 무엇하랴. 깨져서 좋을 사람의 마음이 어디 있겠는가.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깨진 사람의 마음도 칼날이 된다. 그릇도 사람도 똑같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살롱(salon)에서 나누는 말씀 사색www.youtube.com

Salon 2024.10.20

질문

2024년 10월 19일 토요일 "죽음은 대답이 아니라 하나의 큰 질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오는 깨달음은 질문의 형식으로 온다. 죽음은, 유일한 질문이다. 삶의 모든 경험이 바쳐져서 만들어낸 단 하나의 질문이다." 죽음은 종착지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가 얻게 될 마지막 대답인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죽음이 대답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질문이라면? 죽음 가까이 간 사람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답이 있어야 하는 하나의 질문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혼란스럽다.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 온 삶의 경험은 무엇을 위함이었던가! 또 삶의 모든 경험이 바쳐서 만들어낸 단 하나의 결과물이 죽음이라면 삶을 지속해야 했던 당위성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그래서 사람은 죽음 이후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질문은 답이 있어야 한..

Salon 2024.10.19

죽음

2024년 10월 18일 금요일 "죽음은 게으르고, 동시에 즉흥적이다. 요컨대 종잡을 수 없다. 죽음은 올 때까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늦어져도 언젠가는 온다. 늦어질 뿐 철회되지는 않는다. 죽음은 신실해서 온다는 약속을 파기하지 않는다. 다만 오는 시간을 우리가 모를 뿐이다." 주위에 게으르면서도 즉흥적인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과 과연 친구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는 약속했는데 도저히 나타나질 않는다. 기다리다 지쳐서 그만 포기한다. 그런데 포기한 그 순간, 아주 갑작스레 그 친구가 나타난다. 이렇게 게으르고 즉흥적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친구는 결코 약속을 파기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또한 이중인격자다. 게으르지만 성실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그렇다...

Salon 2024.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