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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나의 나 된 것은

20150426 쓰임교회 예배 설교

 

 나의 나 된 것은

 

<사도행전 4장 5-12절>

 

 5. 이튿날 유대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를 비롯해서,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밖에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7.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서 물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8.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9. 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11. 이 예수는 '너희들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12.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Lumix gx9 / 20mm]

 

네팔 카트만두 지진 희생자

 

주님 전에 나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어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 인근에서 규모 7.9의 강진으로 수 천여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사망자의 수는 집계처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이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수에 몇 배 이상입니다. 물론 세월호 침몰과 카트만두 지진의 발생원인은 다르겠지만, 그 죽음들에 대한 슬픔의 깊이만큼은 동일할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생명이 붙어 있는 자신에 대한 이기적인 감사보다 무거운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물어보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됐는지를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답을 내릴 권한은 없습니다. 그저 그들과 함께 슬퍼하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기도할 뿐입니다.


추억 속 기억나는 복음성가

 

이렇게 지금 우리의 마음은 무겁지만, 그럼에도 빛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말씀을 바라 봤으면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주 듣던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나의 나 된 것은’이라는 찬양입니다. 이 찬양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을 모티브로 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

 

제가 여러분께 왜 이러한 찬양의 제목과 성경구절을 말씀드렸냐면, 오늘 말씀의 흐름이 이 찬양의 제목에 오롯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질문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나는 어떻게 나 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스스로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지를 말입니다.

 

지금의 내가 정말 나인가

 

여러분, ‘지금의 나는 정말 나일까?’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나는 실제의 나와 얼마나 닮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지금의 나는 내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닙니다. 지금의 모습과 기질을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성장배경만 생각해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하고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것 중에 하나는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범하는 오류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나’만큼 ‘나’를 모르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 말의 의도와 상대방이 받아들인 말의 의미가 다를 수 있듯이, 우리는 ‘내가 아는 나’와 ‘누군가 아는 나’는 대부분 어긋납니다. 우리는 자신의 뒤통수를 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볼 수 없는 것을 상대는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자기 스스로를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정의 내리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규정지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징표가 있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늘 우리가 함께 들었던 사도행전 4장의 말씀은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못 마땅히 여기는 제사장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합니다. 다음 날, 유대의 지도자들과 장로들,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그러자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자신이 이런 일을 하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마음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전의 말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사도 됨은, 다시 말해 베드로와 요한이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의 신분증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누구인가

 

그럼 여기서 우리는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사도 된 신분을 증명하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말입니다. 예수가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성경은 다양하게 고백합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나는 ~이다.’라고 하는 부분이 일곱 가지 등장합니다.

 

첫째, 나는 생명의 떡이다.
둘째, 나는 세상의 빛이다.
셋째, 나는 양의 문이다.
넷째, 나는 선한 목자다.
다섯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여섯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일곱째, 나는 참 포도나무다.

 

이것이 그 일곱 가지입니다. 그 가운데 네 번째 증언인 요한복음 10장 11-15절 ‘나는 선한 목자이다.’는 부분을 살펴보려 합니다. 본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로 칭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여기서 드러난 예수님은 자신이 돌보는 양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이 말은 요한 공동체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나타낸 그들의 고백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예수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포기하지 않는 희생과 책임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예수께서는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바라기는 이제는 예수님으로부터 보호와 지킴을 받는 것을 넘어 우리 스스로가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보호하고 지켜나가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시대는 우리를 이러한 소명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지켜(protect)야 할 것은

 

더불어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 일 것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딘지, 지금 나는 어디쯤 와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 자문(自問) 해야 합니다. 이러한 질문의 과정과 끝에서 저는 반드시 하늘의 빛, 내면의 빛과 마주할 거란 확신이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빛이겠지요.

 

내가 가진 재산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명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지, 이 마음의 상태를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그것을 우리는 지켜야 합니다. 이것을 지킴으로 곧 내가 누구인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다

 

여러분,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 있을 때입니다. 여러분은 교회 안과 밖에서 어떤 사람으로 보여 지기 원하십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5:5)”고 하셨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때문이라면 삶의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열매 없이 가지만 무성하다면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主)로 고백하는 예수님은 자신의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의 분주한 삶의 문지방을 넘어 여러분들 삶으로 들어가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삶의 본질과 의미를 잃지 않도록 지키고 계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분을 지켜드려야 할 차례입니다.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지켜드리고 환대해야 합니다.

 

갈수록 깊은 욕망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이 시대에,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임을 고백하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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