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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1부] 우리의 기억이 머무는 곳

20150329 청파교회 1부 예배 <종려주일/고난주일> 설교 

 

우리의 기억이 머무는 곳

 

<사 50:4-9; 시 31:9-16; 빌 2:5-11; 막 15:40-47>

 

시편 31:9-16: 주께 피하는 자의 기도 “다윗”
이사야 50:4-9: 주님의 종의 순종 “하나님의 은총, 고난 받는 종을 도우시는 하나님”
빌립보서 2:5-11: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고백” (순종)
마가복음 15:40-47: 예수의 시신을 옮겨간 아리마대 요셉

[Lumix gx9 / 14mm]

우리의 기억 속 종려나무가지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특별히 종려주일이자 고난주일이기도 합니다. 모두 잘 알고 계시겠지만, 부활절 한 주 전 일요일이 바로 종려주일입니다. 이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그를 맞아주던 복음서 이야기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복음서에는 그냥 ‘나뭇가지’라고 기록되어 있거나 따로 ‘나뭇가지’에 대한 호칭이 없지만, 요한복음에만 유일하게 ‘종려나무가지’라고 밝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요한복음의 상징적인 메시지 전달방법이 종려나무가지에도 담겨 있는 듯합니다.

 

이 종려나무는 지금의 ‘대추야자’를 말합니다. 이 나무의 가지는 곧고 수려하게 뻗은 아름다운 외형 때문에 ‘영광’과 ‘아름다움’, ‘기쁨과 승리’ 등을 상징해서 전쟁 영웅들을 환영하는 행사(요 12:13; 계 7:9)에 많이 사용되었고, 또 귀족(사 9:14)들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종려나무가지는 군중들의 헛된 메시아상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전쟁의 영웅과도 같은 ‘메시아, 구원자’로 여겨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그를 종려나무가지로 환영했지만, 이러한 기대가 무너지자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수님의 가장 적대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매년 우리가 종려주일을 기억하고 지키는 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뿐만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메시아 상, 다시 말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들의 기억은 예수님의 어떤 이미지에 머물러 계시는지요?

 

지하철 삼풍백화점의 ‘기억’ 

 

지하철을 타고 가다보면 우리는 다양한 광고를 보게 됩니다. 최근에 2호선을 타고 다니다가 몇 번 반복해서 보게 된 캠페인이 있었습니다. 그 광고는 “삼풍백화점 붕괴”에 관한 캠페인이었습니다. 서울문화재단에서는 그 때를 기억하고 있는 시민들의 제보를 모아내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 중고등부 친구들은 이 사건을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봤을 겁니다. 드라마에서는 나정이를 기다리는 칠봉이가 기적적으로 사고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 장면을 보는 우리의 마음은 그 날의 끔찍함과 아픔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가 있던 그 해에 제 나이는 만으로 11살,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제 나이가 막 계산이 되십니까?) 당시 저는 뉴스를 통해 그 사고를 접했는데, 어려서 상황파악을 하기 힘들었음에도 상황의 심각성은 충분히 느끼고도 남았습니다. 건물 5층이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20여초 만에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합니다. 그로인해 50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되고, 937명이 부상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인명 피해였다고 합니다.

 

사실 지하철에서 목격한 이 캠페인이 당시의 아픔을 기억하게 하는 아주 단편적인 예긴 했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자주 우리가 경험하고 듣고 말했던 수많은 일과 말들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아픈 것이든 기쁜 것이든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중 하나가 “망각”이라고 하기는 하나 가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을 때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이사야 

 

오늘 우리가 성경봉독 시간에 처음으로 들었던 말씀은 이사야입니다. 이사야 50장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악을 목소리 높여 고발하고 있습니다. 4절 이전에 그는 하나님의 입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저주와도 같은 말들을 거침없는 뱉어냅니다. 그러고 나서 4절부터 그는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읽어가다 보면 거칠거칠한 말들 속에 숨겨진 그의 진짜 마음이 조금 느껴집니다. 

 

우리도 가끔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만,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누군가에서 쓴 소리를 하고 돌아선 후, 어딘지 모르게 밀려오는 공허함과 불안감의 경험 말입니다. 옳고 그른 말을 하고 나면 통쾌할 줄만 알았는데 이상하게 홀로된 거 같은 그 기분 말입니다. 이사야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자신의 선지자 됨을 변증하는 듯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말은 하나님과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말씀을 읽다보면 이사야가 처한 상황이 오히려 달리 읽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발하고 난 이후에 하나님을 기억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올곧게 섰던 그에게 다가온 불안함과 두려움, 외부로부터 엄습해 오는 고난의 순간에 그는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마치 이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삶이 좀 불편해진다는 것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너무 편하기만 하다면 자신의 삶을 돌아볼 필요도 있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기억하는 다윗 

 

시편에 등장한 다윗도 이와 비슷한 상황인 듯합니다. 시편 속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굉장한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표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울다 지쳐, 내 눈이 시력조차 잃었습니다.”, “몸과 마음도 활력을 잃었습니다.”,
“슬픔으로 힘이 소진되었고 고통 속에 뼈마저 녹아버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비난합니다.”

 

사실 이 시편31편의 배경을 정확히 알기란 쉽지 않지만, 아마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방황하고 있을 때로 보는 것이 가장 근거 있어 보입니다. 사울 왕에게 쫓겨 갈 곳을 잃은 다윗은 고통이 사방을 에워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붙잡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사실 요즘 같이 이성이 발달한 시대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만큼 어리석어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요즘만큼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성이 높아진 시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한 말이라기 보단 (저를 포함해)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겉모습만 성도’인 이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잊지 않으려는 바울의 가르침 to 빌립보 교회

 

하지만 무엇인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함께 살펴본 빌립보 교회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예수님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했다고 해서 교회의 분위기까지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서신이 쓰일 당시 교회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거짓 교사들의 등장(1:27-30; 2:21)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회 안 성도들 사이에 상당한 긴장관계(2:1-4)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는 바울의 방법은 세상의 법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었고, 특정한 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 되심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예수님의 삶을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하기를 간곡히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 이후 그를 기억하는 남은 자들 

 

하지만 어둠이 가장 짙었을 때에도 예수님을 기억했던 한 용감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리마대(고대 팔레스타인 도시) 사람 요셉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높은 지위에 올랐던 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전쟁의 영웅과 같은 모습으로 기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초라한 죽음 앞에 모두 실망하여 등을 돌리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살펴본 마가복음 이 짧은 단락에 등장한 요셉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그를 기억하여 시신을 찾으러 옵니다. 이 이야기가 기록된 글의 분위기를 보면 요셉이 몹시 슬퍼한다거나 불안해하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덤덤한 모습으로 예수의 시신을 거두러 갑니다. 모두가 떠난 그 순간에도 요셉은 예수를 잊지 못했습니다. 그의 기억은 여전히 예수라는 인물과 삶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억이 머물러야 하는 곳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네 개의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기억’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기억했던 이사야, 고난 중에 하나님을 기억했던 다윗, 예수님의 주인 되심을 기억했던 바울,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도 그를 잊지 못했던 아리마대 요셉까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주님을 향해 자세를 고쳐 앉은 이들을 보았습니다. 

 

1부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삶의 다양한 상황에서 주님을 떠올리며 기억하고 계십니까?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고 어리석다 손가락질 하여도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도우시는 주님을 잊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즘 여러분들은 어떤 기억 속에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종려주일을 맞은 오늘! 우리도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반겼던 수많은 군중들 중 한 사람은 아닌지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 나에게 주님은 어떤 분인지 충분히 또 천천히 묵상하며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 잔잔함으로 하루하루를 충만히 채워가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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