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파 Note

[쓰임 Note] 순례의 의미와 목회, 그리고 일상의 삶

20160320 쓰임교회 주일설교

 

순례의 의미와 목회, 그리고 일상의 삶

 

<역대상 4장 9-10절>

 

9. 야베스는 그의 가족들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고통을 겪으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불렀다.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고, 내 영토를 넓혀 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 이 시간은 성지순례에 대해 보고도 할 겸, 순례 중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픈 좋은 이야깃거리가 있어 그것을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개신교회 성지순례 일곱 가지 의미

 

성지순례 일정 중, 터키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이드 해 주신 김홍기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성지순례’의 일곱 가지 의미가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물론 개신교회의 성지순례 의미 일곱 가지만 소개하고 마치는 것이 아니고, 제가 단독목회하며 경험했던 개인적인 일들과 연결 지어가며 이야기드리도록 할 것입니다. 이 일곱 가지 중에 단 한 가지라도 가슴에 담아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성지순례 일정소개

 

먼저 간단히 성지순례 일정에 대해 말씀드려 본다면, 저희 일행은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지인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등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작된 여정이 ‘카이세리’ 즉 성서 상의 ‘갑바도기아’를 거쳐 성서 상 ‘이고니온’인 ‘콘야’를 거치고, 다음으로는 ‘셀축’ 즉 성서 상 ‘에베소’까지 갔었고, 그리스로 넘어가 고린도를 경유해 데살로니카, 빌립보를 둘러보고 왔습니다. 아주 긴 여정이었지만, 원로 목사님과 사모님을 포함해서 모두가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순례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순례’의 일곱 가지 의미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순례의 일곱 가지 의미가 무엇인지, 또 그 의미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먼저 개신교의 성지순례 첫 번째 의미는 ‘공부하는 것’입니다. 저는 작년 4월부터 단독목회를 시작하며 방황의 날들을 보냈습니다. 방황이라는 것이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어떤 그런 방황(?)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방황, 내적인 방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법과 외면의 법 사이에서 갈등하는 저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근원적인 질문들을 다시 던져보게 됐습니다. 지금의 나에게, 현재의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삶을 바라고 계실까?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읽어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등과 같은 질문들이 계속해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사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이러한 고민들이 저를 공부하게 만드는 힘이 되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이신 신영복 선생님께서 ‘공부’라는 낱말에 대해 이렇게 풀이하셨습니다. 한번 공부(工夫)라는 한자어를 한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장인 ‘공(工)’자에 아비 ‘부(夫)’자입니다. ‘공(工)’자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십시오. 알파벳 아이(I)와 비슷하게 생긴 이 ‘공(工)’자는 도구 혹은 연장의 모양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공(工)’자의 모양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공(工)’자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도구 혹은 연장을 형상화했기에 하늘과 땅의 조화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夫)’자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남편 혹은 사내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두 한자어를 합쳐보면, ‘공부(工夫)’는 도구를 들고 있는 건강한 사내를 일컫게 됩니다. 다시 말해 공부(工夫)란 쟁기를 들고 서 있는 사내, 즉 농사짓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농사짓는다고 하면서 앉아서 머리만 굴려서는 안 되겠지요. 공부(工夫)는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과 매우 밀접한 것, 천지를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것, 몸으로 실천하는 행위 자체가 공부(工夫)의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엄청난 공붓벌레가 아니셨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쟁기를 들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몸으로 세상의 아픈 모든 것들을 품어내셨습니다. 기도하며 아픈 것들을 온몸으로 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늘 간구하셨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다시 혹은 제대로 공부해야 합니다.

 

순례의 두 번째 의미는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생각과 그 생각을 따라주지 못하는 몸의 저항 사이에서 고민이 심했습니다. 신경이 얼마나 쓰였는지 젊은 나이에 질병이 오기도 했습니다. 와사가 잠시 왔었습니다. 물론 두 달 만에 금방 낫긴 했습니다만 정신적인 고난은 육체의 고난으로 까지 이어졌었습니다. 

 

사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고난을 자신의 내면 속에 받아들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전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고통은 인간을 유연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딱딱한 껍질을 깨부숩니다.

 

또 여러분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주로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분의 도우심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은 많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작은 손짓으로, 어떤 때는 책으로, 또는 어떤 말을 통해서 도움의 손길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과 고난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저의 지난 시간을 돌아봤을 때, 보이지 않는 고난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길을 비틀거리면서도 힘 있게 걸어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페터 제발트, <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p.216-217 참조)

 

순례의 세 번째 의미는 안식입니다. 쉬기 위함입니다. 사실 우리는 쉬는 시간이 주어져도 잘 쉬지 못합니다. 잘 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단독목회를 하며 통제하기 어려운 시간들이 쏟아질 때마다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까지 누군가 시키는 일은 했어도 자발적으로 하고자 했던 일이 적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무엇보다 바쁘게 지내온 삶의 탄력 때문에 시간이 주어져도 불안해할 뿐 제대로 쉬지 못하는 저를 보았습니다. 정말 주어진 시간 속에서 쉼을 잘 누린다는 게 어려웠습니다. ‘내가 이래도 되나?’, ‘뭔가 더 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에 힘들어하다가 안식의 새로운 의미와 만나고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일상이 예배고 일상이 하나님과 만나는 삶이 될 수 있음을 느끼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 예수 학자인 크로산이라는 사람이 안식일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안식일의 목적, 이유, 의도는 매주 모두에게, 여기서 모두라 함은 집안 식구들, 자녀들, 노예들, 가축들, 이민자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들 모두에게 똑같은 휴식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안식뿐 아니라, 안식 자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의 몸과 마음이 제대로 쉼과 안식을 누리는 것 자체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안주하겠다는 쉼이 아니라 다시 도약하기 위한 안식의 개념이 저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잘 쉬셔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잘 예배하는 길입니다. (#. 존 도미닉 크로산,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p.112 참조)

 

순례의 네 번째 의미는 교제하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공동체)입니다. 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누군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사람이 그렇다고 하지 않습니까? 함께 있을 줄 알아야 혼자일 때의 소중함을 알고, 혼자일 줄 알아야 함께 함의 소중함을 안다고 말입니다. 제게 단독 목회의 시간은 그런 의미를 깨닫는 시간들이었고, 지금도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공동체는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공동체의 소중함은 다양하게 접근이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공동체는 내가 더 하나님의 사람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이란 뭔가에 꽉 붙들린 그 무엇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사실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함을 공동체 내에서 나누고 드러내는 순간, 대부분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음을 경험하게 되고, 오히려 나의 불안함과 너의 불안함이 만나 더 큰 불안함이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감싸는 따스한 기운이 모두의 불안함을 없애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거룩한 영, 성령의 역사라 말하고 싶습니다. 공동체와 함께 나누는 교제는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순례의 다섯 번째 의미는 성령이 역할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것입니다. 제가 조금 전 공동체 이야기를 하며 성령의 역할이 서로 간의 불안함을 없애주는 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는 성령의 역할은 무엇이냐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성실히 살아내게 하는 힘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가장 성실하게 살아낼 수 있게 하는 힘, 저는 성령의 역할은 지극한 ‘평범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상이 무료하고 답답할 때마다 자극적인 것들을 찾곤 합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모두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극은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된다는 악순환 때문에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도 무료한 일상을 사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성경은 그분이 평소에 무엇을 했는지 낱낱이 기록하고 있진 않지만, 저는 충분히 우리와 같이 평범한 시간들을 보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저희라고 해서 뭐 특별할 게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평범하게 주어진 그 삶을 살아내면 되는 것이겠지요. 사실 우리는 어떤 사건, 사고가 터져야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평범한 삶을 성실히 살아내는 것이 가장 복된 삶인 것입니다.

 

순례의 여섯 번째 의미는 성경에 나오지 않은 교회도 성지라고 본다면 ‘지금 우리가 있는 우리의 교회들도 성지로 보는 것’입니다. 서두에 비슷한 이야기를 드리긴 했습니다만, 저는 안수를 받기 전에 스스로 목사가 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따로 목회지를 알아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가 수련목회자 과정을 밟을 때만 해도 무조건 단독목회를 나가야 안수를 주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수를 받으려면 목회지가 있어야 했는데, 목회지를 구하는 것 또한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연회가 열리기 2주 전쯤 성남의 한 목회지를 알게 됐고 그 교회로 오게 됐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쓰임교회입니다.

 

처음 교회를 보러 왔을 때 교회라는 느낌보다는 아담한 작업실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남에 연고가 없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교회에 정을 붙이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과정 중이긴 합니다만, 쓰임교회에 몸담았던 목회자분들과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 쓰임교회를 위해 기도하셨을 분들을 떠올리다 보니 아담한 이곳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이 교회를 소중하게 여기며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지금 다니시는 교회를 생각할 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사실 여러분이 다니시는 그 교회도 성지가 될 수 있고, 어쩌면 이미 거룩한 땅, 성지인 것입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그곳에 발 딛고 있는 이들의 마음가짐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짧은 글을 읽어드릴까 하는데요, 여러분들께서 섬기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을 생각할 때 이런 마음이셨으면 좋겠어서 준비해 봤습니다.

 

“가슴이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있다. 누군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이 있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미안한 사람들이 있다. 설렘과 황혼, 그리움, 사랑의 느낌. 이런 것들이 살아 있음을 기쁘게 만든다. 나는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손잡고 더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미래의 어느 날이나 피안(彼岸)의 세상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 (#.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p.56)
 

여러분의 교회도 이런 생동감으로 가득하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그곳이 자연스레 거룩한 땅, ‘성지’가 될 것입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곳으로 성지순례를 올 것입니다. 

 

마지막 순례의 일곱 번째 의미는 선교지역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나와 타자를, 문화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제가 좀 전에 성남에 연고가 없었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러다 성남에 사시는 몇몇 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성남에 담긴 아픔과 어려움도 알게 되고 그 문화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터를 잡고 사시는 분들에 대한 이해, 즉 사람에 대한 이해는 제 생각의 폭을 훨씬 넓혀주었습니다.

 

사실 선교지역에 대해 알고 이해한다는 말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신영복 선생님께서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의 인생사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아온 삶의 역사적(?) 결론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다시 쓸 수 없듯이, 누군가의 생각에 관여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나 자신의 생각 역시 옳다는 보장이 없음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 또한 수많은 삶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며 말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정서를 키워 갈 수 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신영복, <담론>, p.230 참조)

 

우리가 한 사람의 인생사를 읽어낼 줄 안다면, 누구도 쉽게 비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고하는 훈련이 타인을 향해, 교회를 향해, 그리고 지역과 나라를 향해야 하고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지금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인생사를 이해하는 것을 시작으로 나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것이 성지순례의 마지막 의미인, 선교지역에 대해 아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서두 없는 이야기가 참 길었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개신교의 ‘순례’의 의미 일곱 가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순례란,
첫째 ‘공부하는 것’이다.
둘째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셋째 ‘안식하는 것’이다.
넷째 ‘교제하는 것’이다.
다섯째 ‘성령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다.
여섯째 성경에 나오지 않는 교회도 성지라면 ‘우리가 있는 교회도 성지임을 아는 것’이다.
일곱째 ‘선교지역에 대해 아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행자는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 저와 여러분 모두 일상의 순례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www.youtube.com

 

728x90
728x90

'@ 청파 No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쓰임 Note] 그 한 사람이 되었는가?  (0) 2016.03.28
20160327 주보  (0) 2016.03.27
20160320 주보  (1) 2016.03.19
[쓰임 Note] 그 음성이, 내 귀에 들리기를  (0) 2016.03.06
20160306 주보  (0) 2016.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