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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열왕기하 (4)] 아하스의 두 마음

20230302 청파교회 새벽설교

 

아하스의 두 마음

 

<열왕기하 16장 15-16절> 

 

15. 아하스 왕은 우리야 제사장에게 명령하였다. "아침 번제물과 저녁 곡식예물, 왕의 번제물과 곡식예물, 또 이 땅의 모든 백성의 번제물과 곡식예물과 부어 드리는 예물을, 모두 이 큰 제단 위에서 드리도록 하고, 번제물과 희생제물의 모든 피를, 그 위에 뿌리시오. 그러나 그 놋제단은, 내가 주님께 여쭈어 볼 때에만 쓰겠소." 

16 우리야 제사장은 아하스 왕이 명령한 대로 이행하였다.

 

 

앗시리아의 제단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열왕기하 16장입니다. 열왕기하 16장은 남유다의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는데, 요담에 이어서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에 등극합니다. 아하스는 후대에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왕에 해당됩니다. 그는 이방 종교에 심취해 있었고 변질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어느 날, 남유다를 위협하는 무리가 찾아옵니다. 시리아의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왕 베가예루살렘을 치기위해 아하스를 찾아옵니다. 그들은 금세 남유다를 포위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남유다는 쉽게 정복당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의 위협이 계기가 되어 (남유다의 왕) 아하스가 그들의 뒤를 치게 됩니다. 아하스강대국 앗시리아(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자신을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위협에서 구원해달라고 앗시리아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하스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 왕에게 경의를 표하였고, 그의 앞에 굴복한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전에 있던 금과 은을 모두 꺼내어 앗시리아 왕에게 선물로 보냅니다. 

 

앗시리아 왕아하스의 요청에 응합니다. 아하스의 정성에 마음을 열었고,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그렇게 앗시리아 왕은 다마스쿠스로 진군하였고, 그곳에서 시리아 왕 르신을 살해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하스는 고마움을 전하고자 앗시리아 왕이 있는 다마스쿠스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자 앗시리아 왕이 세워 놓은 제단을 보았는데, 그 모습에 반하여 동일한 모양의 제단을 쌓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그는 제단의 모형과 도본을 상세히 그려서 남유다의 제사장이었던 우리야에게 보냈습니다

 

당연히 아하스가 도본을 뜬 제단우상을 섬기기 위한 제단이었습니다. 아하스는 여전히 하나님을 등진 채, 우상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아하스의 두 마음

 

제사장 우리야는 아하스가 다마스쿠스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제단을 다 완성했습니다. 아하스는 곧 돌아왔고, 그는 돌아오자마자 새롭게 지어진 제단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번제, 화목제 가릴 것 없이 모든 종류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하스는 좀 흥미로운 왕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완전히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방신을 전적으로 섬기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자도 아니었습니다. (1) 아하스는 자기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가 하면, 주님의 성전 밖에서 이방신들을 섬기는 별도의 제사 행위를 행하기도 했습니다(4). 아하스는 이처럼 이방 민족의 (역겨운) 풍속을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2)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주님을 완전히 버리지도 못한 자이기도 했습니다. 아하스는 주님의 성전을 아예 없애지는 않았고,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돌아와서 새로운 제단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도 주님의 제단이었던 놋 제단은 허물 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께 여쭐 일이 있을 때 놋 제단을 활용할 예정(15)이었습니다. 

 

아하스는 이처럼 마음을 온전히 정하지 못한 그런 갈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안정이 필요했던 아하스 

 

사실 아하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곁눈질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아닌 것들에 자주 마음을 빼앗기는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실 우상이라고 하는 게,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외에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유혹은 아무래도 불안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결코 앞일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사회불안을 가중시켜 우리를 자꾸만 구석으로 몰아붙입니다. 

 

사실 아하스주님과 이방신을 동시에 섬겼던 이유욕심이 많아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민족이었지만, 외세의 위협이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유다강대국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불안했을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침략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안정이 필요했기에 주님도 버릴 수 없었고, 앗시리아의 우상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탓하자면 탓할게 정말 많은 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성서 기자에 의하면, 아하스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그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어두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하스를 향해 믿음 없는 자 혹은 두 신을 섬기는 자라고 손가락질만 할 수 없는 이유그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많은 가능성을 품은 자이지만 그러나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데, 바로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불안한 삶, 흔들리는 믿음을 두고 주님께 도움을 구해야합니다. 불안한 마음을 흔들리는 믿음을 붙들어달라고 말입니다

 

불안원인을 알면, 잠잠해지는 법입니다. 그런데 불안우리의 인식 너머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또한 우리의 능력 밖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움을 구해야합니다. 주님께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그럼 주님은 반드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실 겁니다. 하루하루, 주님과의 관계신뢰 속에서 두터워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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