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깨달음이란 우선 이처럼 자신이 깨뜨려지는 충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옳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근본에 있어서
시대와의 불화(不和)이어야 하리라.
사건과 같은 충격 그리고 충격 이후에
비로소 돌출하는 후사건(後事件)이 깨달음의 본모습이 아닐까.
"깨달음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반성해야 하는 것은
깨달음마저도 소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는 불화와 긴장 그 자체가
지혜인지도 모른다.
신영복, <변방을 찾아서>, 돌베개, p.100-105
자신이 깨뜨려져야 얻어진다는 '깨달음.'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깨어지고 또 깨어졌는가. 우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능동적이어야 하겠지만, 수동적이지 않은 깨달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틀을 깬다는 것이 꽤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리라.
신기하게도 진정한 깨달음은 늘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과 부딪힌다. 시대와 부딪힌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고향으로부터 너무 먼 곳으로 밀려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왜 깨달음이 시대와의 불화를 겪어야만 하는가. 상징계 속을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이란 존재여.
하지만 깨달음을 스스로 소유하려는 자여 늘 조심하기를. 깨달음을 우리의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순간 이미 깨달음이 아닌 것임을. 그러고 보면 깨달음이란 늘 수동적인 모습으로 만나야 되는 시간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나누는 성경 이야기
www.youtube.com
728x90
728x90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세이] "신 없이 신 앞에(ohne Gott vor Gott)" (1) | 2013.05.16 |
---|---|
[에세이]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0) | 2013.05.16 |
[에세이] 변방(邊方)을 찾아서 (0) | 2013.05.16 |
[에세이] 호접몽(胡蝶夢), 나는 누구인가 (0) | 2013.05.16 |
[에세이] '사랑'은 '요구'하는 것이다 (0) | 2013.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