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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책]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Part.2

 

1. 상징적 동일시의 엄격한 정신분석학적 개념의 궁극적 역설은 그 동일시는 명확히 잘못된 동일시, 대타자(들)가 나를 잘못 인식하는 방법과의 동일시라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예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아버지로서 나는 내가 절조가 없는 연약한 사람인 것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나는 내 안에서 내가 아닌 것을 - 정당한 대의를 위해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위엄과 강한 원칙의 사람을 - 보고 있는 나의 아들을 실망시키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잘못된 인식의 나와 동일시하여 사실상 이러한 잘못된(실제적인 나로서 나의 아들에게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나는 실제적으로 영웅적인 행위들을 완성하는) 인식에 따라 행위하기 시작할 때 참으로 '나 자신이 된다.'

 

다른 말로 이야기해서 만약 우리가 상징적 동일시를 설명해야 한다면 내가 타자들에게 보이는 방법과 실제적인 나로 존재하는 방법 사이의 반대를 언급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방법이 '나의 사회적인' - 나로 하여금 '나 자신 안에서부터' 결코 완성할 수 없는 것들을 하도록 강요하는 - '마스크 이면'에 있는 심리적 실재보다도 더 중요할 때 상징적 동일시는 일어난다. 

 

슬라보예 지젝,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인간사랑, p.78-79

 

'상징적 동일시'란 주위의 심리적 영향으로 내가 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상관없다.
어쩌면 개인에게 주어진 적당한 심리적인 부담 혹은 압박은 나의 또다른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마중물인지도 모른다. 

 

2. 사람들이 한 공동체의 완전한 멤버가 되려면 그 공동체의 명백한 상징적 전통과의 동일시를 갖고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의 전통을 유지해 주는 유령적인 차원 - 사람들에게 출몰하는 죽지 않은 유령들, 즉 결핍과 왜곡들을 통해 '행간 사이'로 전해져 내려온 외상적인 환상들의 비밀스러운 역사 - 을 갖고 있어야 한다. 

 

유태교 전통에는 한 랍비가 그의 제자에게 신적인 비전을 본 선지자의 전설을 서술하고 있는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 젊은 제자가 랍비에게 '이것이 사실입니까? 정말 일어난 일인가요?'라고 물을 때, '아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것은 진실이다'라고 랍비는 대답한다. 

 

같은 방식으로 최초의 아버지 살해와 프로이트적인 다른 신화들은 어떤 의미에서 실재보다 더 실제적이다. 물론 그것들은 '정말로 일어나지 않았던 이야기들'일지라도 - 유령적인 그 이야기들의 존재는 명백히 상징적인 전통을 유지시켜 주기 때문에 - '진실'인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인간사랑, p.99

 

기독교 전통에서 본다면 성만찬이 '상징적 전통'에 속한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기독교 공동체를 유지해 주는 것은
이와 같은 '상징적 전통'을 통해서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체험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유령적인 차원'을 통해 유지된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정말로 일어나지 않았던 이야기들'일지라도
기독교 전통을 유지시켜 준다면  예수의 부활은 '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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