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작가야의 BibleSalon

인문학 75

시절

2025년 2월 18일 화요일 / 목덜미가 뻐근한 아침  "아기도 아니고 소년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고아도 아니고, 보호의 품은 깨어졌으나 홀로 걸어갈 내 안의 무언가는 깨어나지 못한 나이(일곱 살). 문득문득 한낮의 어둠이 찾아오고 한밤의 몽유가 걸어오고, 자주 세상의 소리가 끊어졌고 이 지상에 나 혼자인 듯 아득해지곤 했다." (박노해, , 느린걸음, 2024, p.45)  소설가 김연수는 청춘을 일러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정거장 같은 나이. 늘 누군가를 새로 만나고 또 떠나보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는 나이. 옛 가족은 떠났으나 새 가족은 이루지 못한 나이" 당시 이 문장에 왜 그렇게 공감이 됐을까. 내가 그 시절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오늘 박노해 선생의 책을 읽다가 그보다 더 어린 시..

Salon 2025.02.18

고독한 사람

2025년 2월 16일 일요일 / 떠드는 아이들 사이에서 글쓰는 중  "고독하고 말없는 사람이 관찰한 사건들은 사교적인 사람의 그것보다 더 모호한 듯하면서 동시에 한층 집요한 데가 있다. 그런 사람의 생각들은 더 무겁고 더 묘하면서 항상 일말의 슬픔을 지니고 있다. 한번의 눈길이나 웃음, 대화로 쉽게 넘어 갈 수 있는 광경이나 지각들조차 지나치게 신경쓰게 하고, 끝내 그의 침묵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가서는 중요한 체험과 모험과 감정들로 남는다. 고독은 본질적인 것, 과감하고 낯선 아름다움, 그리고 시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고독은 또한 역설 불균형, 그리고 부조리하고 금지된 것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여행 도중에 보았던 현상들, 그러니까 애인에 관해서 헛소리를 해 대던 볼썽사나운 멋쟁이 늙은이와, 뱃..

Salon 2025.02.16

신전

2025년 2월 12일 수요일 / 눈 맞으며 조깅 출근한 날 "굶은 상처에 시달리며 보람 없이 살다 도시의 골목에 쓰레기처럼 버려져서 죽어가더라도 인간은 내면에 신전을 세울 힘을 간직하고 있다. (...) 릴케에게는 이것들이 천사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인간의 고통 속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된다." (김인환, , 난다, 2020, p.91)  릴케의 시 를 해석한 김인환 선생의 관점이다. 그의 관점을 긍정하며 나의 이야기를 보태려고 한다. 릴케에게 인간은 '의지할 곳 없이 공허와 고통에 시달리는 존재이고 해석된 세계에서 관습에 맹종하는 존재'(88쪽)이다. 그에게 인간은 나약하고 늘 고통받는 존재이다. 그러나 릴케는 인간의 가능성을 한계 안에 가두지 않는다. 그는 인간을 가엽게 여기는 만큼 또한 적극..

Salon 2025.02.12

어머니

2025년 2월 11일 화요일 / 정동 나들이 후 출근  "내면의 황야에 살고 있는 괴수를 달래지 못하면 무너져 내리는 산더미에 압사당하고 만다. 어머니는 아들을 혼돈에서 지켜주는 은신처가 될 수 있으나 보호는 아들의 존재를 왜소하게 제한한다. 아들은 어머니의 보호를 받지 않고서도 핏속에서 솟구치는 태고의 용솟음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자제력을 훈련해야 한다." (김인환, , 난다, 2020, p.89-93)  몇 해 전, 요조가 하는 독립책방에 갔다가 끌린 듯 릴케의 시집을 샀다. 제목은 였다. 집에 돌아와 읽어보려고 몇 번 시도하였으나 쉽지 않았다. 시라는 문학의 장르 자체가 어렵기도 했지만 릴케의 이 시는 더 쉽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많이 읽힌 시라고 했지만 난 아직 일반 시민의 수준에 미치지 못..

Salon 2025.02.11

어두운 밤

2025년 2월 8일 토요일 / 당일치기 부산행 여파  "감각의 욕구에 끌려다니며 식욕과 색욕 이외에는 다른 관심이 없이 사는 생활에도 그 나름의 이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 있는 것은 거짓된 밝음뿐이다. 참되고 한결같은 밝음에 가깝게 다가서려면 감각의 밤을 거쳐야 한다. 많은 책을 읽고 글자로 진리를 밝히려는 사람은 그 책들의 무게에 짓눌려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욕심을 줄이고 글자를 멀리하는 사람의 위험은 신비에 맛을 들이는 것이다. 신비의 유혹에 굴복하여 기쁘고 즐겁고 재미있는 일만 따라가다 보면 감성과 추리와 상상만으로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되는 때가 온다. 재미에 기인하는 열심은 하느님께 대한 요구를 필요 이상으로 대담하게 만들고, 버릇없고 볼썽사납게 만든다."..

Salon 2025.02.08

무시

2025년 2월 7일 금요일 / 평안 뒤에 감춰진 분주함 "한밤에 앉아서 나를 무시한 사람들과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서 나는 화내는 대신에 무시받음을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 무시받을 만한 면이 내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화를 낼 이유가 없으며 무시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일부러 피할 것도 없다. 그들을 모두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하게 될 정도로 고립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병든 아이들이 친하듯 서로 통하는 것이 우정이라면 그들과 친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인환, , 난다, 2020, p.66-67)  별것 아닌 이야기 같지만 엄청난 통찰이다. 사람은 무시당하는 걸 싫어한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부터의 무시는 더 견딜 수 ..

Salon 2025.02.07

형편없음

2025년 2월 6일 목요일  "이제부터는 형편없음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아내에게도 아우에게도 친구들과 제자들에게도 좋게 봐 달라고 보채지 않으려 한다. 나는 내가 자기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지금 나의 목표는 메마름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김인환, , 난다, 2020, p.66)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근사하고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한다. 물론 늘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부러운 사람이 있다. 특별히 다른 이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이다. 그도 그 나름의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은 대상은 존재하겠지만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은 그 범위가 좁은 사람이다. 사실 누구에게나 형편..

Salon 2025.02.06

생사

2025년 2월 5일 수요일 "우리는 생에도 공을 들이고 사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 생사를 초월한다는 것은 생사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병이 들면 의사의 지시를 따라 정성스럽게 수술을 받고 약을 먹는 것이 죽음에 공을 들이는 일이며 만나는 모든 사람을 친구로 여기고 잘되라고 빌어주는 것이 삶에 공을 들이는 일이다." (김인환, , 난다, 2020, p.62) 생사를 초월한다는 근사한 말이 있다. 이 말을 근사하게 여겼지만 사실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도 못한 채 그저 감동만 받아왔다. 오늘 그 의미를 발견했는데 아주 좋은 텍스트를 통해 발견했기에 운이 좋다고 말해야겠다. 생사를 초월한다는 말은 생과 사를 차별하여 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삶과 죽음을 모두 귀하게 여긴다는 뜻일 테다. 그런데 막상 말을..

Salon 2025.02.05

많음

2025년 2월 4일 화요일 "간음할 음(淫)자는 원래 물 넘칠 음 자였다. 섹스를 지나치게 해서 건강을 상하게 하는 것도 음이고 여러 여자와 섹스를 하여 법망에 걸리는 것도 음이다. 공부를 과도하게 하는 것도 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를 잘못하면 책의 무게에 짓눌려서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 (김인환, , 난다, 2020, p.59)  한동안 나를 사로잡은 개념은 많이 해서 나쁠 게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많이 하면 못하기 어렵다는 말이 큰 자극이 됐다. 당시에 축구든 볼링이든 독서든 연애든 많이 해서 실력(?)을 쌓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김인환 선생님은 이 '많음'에 대해 우려를 표하신다. '많음'도 분야를 가려가며 해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남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의 '많음'은 지..

Salon 2025.02.04

모순

2025년 2월 1일 토요일 / 넘버원 흉봐서 괜히 찔리는 기분 "음탕은 짐승처럼 살게 하고 착취는 귀신(아귀)처럼 살게 하고 폭력은 독재자(아수라)처럼 살게 한다. 제 안에 도사린 모순에 항복하여 존재의 근거를 상실하면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김인환, , 난다, 2020, p.54)  고민 지점이다. 나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내 안에 짐승이 있고 내 안에 귀신이 있고 내 안에 독재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가장 문제이다. 이 세 가지를 계속 가두어두고 살아야 하는가. 억압은 반드시 저항하는 법. 그렇다면 모든 것을 분출하면 되나. 그럼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억압도 아니고 해방도 아닌 그 중간지점이 어디인가가 늘 고민이다. 일단 아는 것이 중요..

Salon 2025.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