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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에세이] 삶의 현존

 

얼마 전, 평생 남의 빨래를 하며 살아야 하는 도비왈라에 대한 생각을 기록했었다. 당시 나는 그들의 삶이 고달프고 억울해 보인다는 이유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마치 어떤 거룩한 정의감에 사로잡힌 듯 말이다. 그러나 인도의 예수회 신부인 앤소니 드 멜로(토니)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 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콜카타에서 만난 한 인력거꾼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인력거를 끌기 시작하면 이 가난한 사람들은 10년에서 12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한다. 결핵 때문이다. 그 인력거꾼은 두개골을 고작 10달러 정도에 매매하는 불법 행위 단체에게 죽음 이후 삶마저 넘겨준 상태였다. 더구나 그에게는 아내와 자식도 있었다. 토니는 그에게 “당신의 미래와 자식들의 미래에 대해 실망스럽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들려올 대답은 뻔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저는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지만 나머지는 하느님 손에 달려 있지요.” 토니는 재차 물었다. “이봐요, 지금 결핵에 걸리셨잖아요? 그것 때문에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들려오는 대답은 “조금요, 삶이 다가오면 받아들여야죠.”였다.

 

토니(앤소니 드 멜로)는 그가 기분 나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와 말하고 있으면 갑자기 한 신비가의 현존 앞에 서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토니는 삶의 현존 앞에 있었고 바로 거기에 삶이 있었다고 했다.

 

운 좋은 일치였는지 몰라도 도비왈라와 인력거꾼은 같은 인도 땅의 사람들이었다. 평생 빨래를 해야 하는 사람과 평생 손님을 태우고 자신은 타보지 못할 인력거를 끄는 두 부류의 사람의 삶의 품격은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어느 삶이 더 낫다고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희망도 없고 평화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 나를 기준선에 세워두고 대상을 바라보았고, 그러다보니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았으며 내가 느끼고 싶은 대로 느꼈던 것이다. 그들 삶의 고달픔을 논하기 전에 그들과 나는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랐다. 나는 그저 내 자리에서 그들의 삶을 읽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는 기준 자체가 없었다. 아니, 그 기준이 중요하지 않았다. 현재만 있었다. 이것은 삶의 포기와는 다르다. 그들은 그들이 숨 쉬는 곳, 현재의 생동감을 힘껏 끌어안고 있었다.

 

사실 지금의 내 삶을 긍정할 수 있어야 다른 이의 삶도 정성껏 보살필 수 있다. 삶이 품고 있는 모순이라는 선물이다. 나의 삶을 먼저 유쾌함으로 살아낼 때, 다른 이의 억울함에 즐겁게 싸워줄 수 있고, 다른 이의 슬픔에 함께 아파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 앞에 놓인 삶의 들숨과 날숨부터 수월하게 해보자. 그것부터 시작해보면 미처 보지 못한 것도 보게 되지 않을까.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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