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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새벽]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

20190824 청파교회 새벽설교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

<여호수아 8장 18-29절>

18.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쥐고 있는 단창을 들어 아이 성 쪽을 가리켜라. 내가 그 성을 네 손에 넘겨 준다." 여호수아는 들고 있던 단창을 들어, 아이 성 쪽을 가리켰다. 
19. 그가 손을 쳐든 순간, 복병들이 잠복하고 있던 그 곳에서 재빨리 일어나서 돌진하여 들어가 성을 점령하고, 순식간에 그 성에 불을 놓았다. 
20. 아이 성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니, 연기가 그 성에서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 곳으로도 도망할 수 없게 되었다. 광야로 도망하는 척하던 이스라엘 군대는 뒤쫓던 사람들에게로 돌아섰다.      
21.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 사람은, 복병이 그 성을 점령하고, 연기가 그 성에서 치솟는 것을 보고는, 돌이켜서 아이 성의 사람들을 무찔렀다. 
22. 복병들도 아이 성의 사람들과 맞서려고 성 안에서 나왔다. 이제 아이 성 사람들은 앞 뒤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쳐죽였으며, 그들 가운데서 살아 남거나 도망한 사람이 없었다. 
23.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이 성의 왕만은 사로잡아 여호수아에게로 끌고 왔다. 
24. 이스라엘 사람은 광야 벌판에서 자기들을 뒤쫓던 모든 아이 성 주민을 다 죽였다. 그들이 모두 칼날에 쓰러지자, 온 이스라엘 군대는 아이 성으로 돌아와서, 성에 남은 사람을 칼로 죽였다. 
25. 그 날 아이 성 사람 남녀 만 이천 명을 모두 쓰러뜨렸다.      
26. 여호수아는, 아이 성의 모든 주민을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칠 때까지, 단창을 치켜든 그의 손을 내리지 않았다. 
27. 오직 가축과 그 성의 전리품은,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차지하였다. 
28. 여호수아는 아이 성을 불질러서 황폐한 흙더미로 만들었는데,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29. 여호수아는 아이 성의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매달아 두었다가, 해가 질 때에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려, 나무에서 그의 주검을 끌어내려 성문 어귀에 내버리게 하였다. 사람들이 주검 위에 큰 돌무더기를 쌓았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아이 성’ 진격

안녕하세요. 어제에 이어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 성’ 점령을 앞둔 아주 긴박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이 성‘ 근처에서 진을 치고 있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아이 성’ 사람들과 맞서기 위해 싸움터 나갔습니다. 그리고 ‘아이 성’ 사람들이 자신들과 맞서기 위해 나타나자 패하는 척하며 도망을 쳤습니다. 성안에는 이스라엘 군대를 뒤쫓지 않은 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마 ‘아이 성’ 사람들은 한번 패배의 경험이 있던 이스라엘 군대를 단번에 전멸시킬 작정이었던 모양입니다. 

바로 그때, 여호수아는 단창을 높이 들고 ‘아이 성’을 향해 팔을 뻗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신호였습니다. ‘아이 성’ 서쪽에 매복해 있던 5천 명의 군대에게 보낸 작전 신호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손을 높이 들자, 잠복해 있던 복병들은 재빨리 얼어나 성안으로 돌진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순식간에 성을 점령했고, 성을 불로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 성’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자신들의 성에 연기가 치솟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몹시 당황해 뒤돌아 도망치려 하였으나, 모든 상황을 예상하던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그들은 앞뒤로 싸임을 당하게 되고, 결국 전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날 목숨을 잃은 ‘아이 성’ 사람은 남녀 합하여 ‘만 이천 명’쯤 됐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름대로 된 ‘아이 성’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아이 성’은 본래의 이름대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아이 성’의 ‘아이’는 ‘폐허’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아이’라는 동네의 지명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아닌지 확실히 알 순 없습니다. 다만, 성경의 이야기를 근거로 추측할 뿐인데요. 그런데 참 재밌는 건,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이름’이라고 하는 건, 주로 좋게 혹은 좋은 의미로 짓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동네의 이름을 ‘폐허’라고 지었던 건, 어쩌면 이 ‘아이 성’은 <여호수아서>의 저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극적인 승리를 위해 의도적으로 창작해낸 동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성경이 전하는 의미가 왜곡될 리는 없습니다. 대게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약간의 허구 속에서 생의 진리를 드러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쨌든 이름대로 이루어진 사건, 이것이 ‘아이 성’ 사건의 또 하나의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이름 붙일 것인가?

‘이름’ 혹은 ‘호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하는 이야기가 있어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류시화 작가가 자신의 SNS에 올린 글입니다. 


 

인도를 여행하다 보면 게스트하우스의 방마다 어김없이 기다리는 손님이 있다. 다름 아닌 도마뱀이다. 현지에선 ‘칩칼리’라 부르는 이 불청객들은 낮에는 밖에서 일광욕을 즐기다 저녁이면 벽의 구멍으로 들어와 천장과 벽에 달라붙어 있다. 날벌레를 잡아먹기 때문에 전구 옆에서 시끄럽게 싸우기까지 한다. 누워 있는 내 얼굴 위로 추락한 적도 있다. 크기가 작기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는 말은 순 거짓이고, 노란색 파충류가 살에 닿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했다. 물론 도마뱀이 더 많이 놀랐다. 그 후 잠들면서도 녀석들의 위치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게스트하우스 주인들은 투숙객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에 너그럽거나 무관심해서 도마뱀을 쫓아내지 않는다. 한번은 배낭 속에 웅크리고 있는 녀석을 발견한 적도 있다. 하마터면 한국까지 데려올 뻔했다. 이 침입자들과 친해지기 위해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이름을 지어 주는 일이다. 도깨비, 도토리, 도망자, 도루묵 등이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안녕, 류시화~ 어딜 부질없이 다니시나?” 하고 묻는 도마뱀들에게 나도 인사를 한다. “도루묵, 안 싸우고 잘 지냈어? 도토리와 도망자도?” 그럼 알아듣기라도 하듯 똑-단추처럼 생긴 눈을 연신 굴린다. 이름을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우호적이 되고 사이좋은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이름 붙여 주기(naming)’는 명상의 한 방법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게스트하우스와 같아서 여러 감정이 번갈아 가며 찾아온다. 반가운 손님도 있지만 어떤 감정들은 불청객이다. 마음의 방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소란을 피우고, 불평하고, 문을 발로 차서 하루를 망친다. 잠들 때까지 주인의 영혼을 괴롭히는 감정들도 있다. 무의식에 난 틈새로 나타나기 때문에 쫓아내기도 어렵고 가둬 둘 수도 없다. 

‘마음 명상’에서는 그 것들에게 이름을 붙여 줄 것을 권한다. 슬픈 감정이 오면 “슬픔, 너구나. 어서 와.”하고 이름을 불러 준다. 불안과 두려움에게도 “안녕, 불안. 안녕, 두려움.”하고 말해 준다. 고통스러운 기억과 함께 분노가 일어나면 얼른 이름을 불러 준다. “안녕, 기억. 안녕 분노. 어서 와. 또 왔네.”하고. 

이 명상법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호흡과 함께 ‘불안, 불안’, ‘분노, 분노’, 혹은 ‘계획, 계획’이라고 두세 번 이름을 불러 주는 것만으로 그것들에 휩쓸리지 않고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명상 중에 신체적인 감각이 느껴질 때 마음속으로 ‘가려움, 가려움’, ‘두통, 두통’하고 이름을 붙여 주면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 산만한 생각들과 부정적인 감정의 희생자가 되지 않는 방법이다. 고대의 샤먼들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의 이름을 알면 그것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름 붙여 주기’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에게 “어서 와.”하고 환영하고 차를 권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깨어 있을 수 있다. 그것들과 나의 자각 사이에 공간이 생겨난다. 이름을 붙여 준다는 것은 ‘나는 내가 화가 나 있음을 자각한다.’, ‘나는 내 왼쪽 발바닥이 가려운 것을 자각한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일 때, 자신이 나무 아래 앉아 명상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안녕, 열등감! 안녕, 공격성!”하고 이름을 붙여 줘 보라. 저절로 미소 지어질 것이다. 이것이 고대부터 전해져 오는 ‘마음 챙김의 기술’이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나는 잠시 화가 났을 뿐이지, 화가 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잠시 두려울 뿐이지, 두려운 사람이 아니며, 잠시 슬플 뿐이지, 슬픈 사람이 아니다. 잠시 외로울 뿐, 외로운 사람이 아니다. 본래의 나는 맑고 고요한 존재이다. 

마음속에 찾아오는 사념과 감정들을 적으로 여기지 말고 협력자로 만드는 것이 명상의 기술이다.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데 도움을 주는 협력자로. 다정하게 맞이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어둠 속에 갇혀 괴물이 된다. 여인숙의 도마뱀 도루묵과 도망자와 도토리가 불을 끄면 공포의 괴물로 변하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작은 실천

여러분께서는 오늘 하루에 어떤 ‘이름’을 부여해 주실 겁니까? 여러분 자신과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어떤 방식으로 ‘호명’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더 구체적이고 더 인자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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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작가야입니다. 말씀을 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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