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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금요일] 무엇을 알아주길 바라는가?

20190419 청파교회 고난주간 성금요일 설교

무엇을 알아주길 바라는가?

<요한복음 19장 1-7절>

1. 그 때에 빌라도는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으로 쳤다.
2. 병정들은 가시나무로 왕관을 엮어서 예수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힌 뒤에,
3. 예수 앞으로 나와서 "유대인의 왕 만세!" 하고 소리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다.
4. 그 때에 빌라도가 다시 바깥으로 나와서,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그 사람을 당신들 앞에 데려 오겠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나는 당신들이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라오."
5. 예수가 가시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으신 채로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보시오, 이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6. 대제사장들과 경비병들이 예수를 보고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러자 빌라도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하고 말하였다.
7. 유대 사람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금요일(Good Friday)

안녕하세요, 오늘은 성금요일(Good Friday)입니다. 성금요일은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하루 전 또는 바로 전을 기념하는 날로써, 가장 어둠이 짙은 날을 말합니다. 하지만 교회들은 예수의 처형이 하나님과 죄인들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었다는 믿음에서 이날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십자가 처형의 끔찍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영어로는 성금요일을 ‘Good Friday’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성금요일의 이 ‘어두움’이 끝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듯이, ‘가장 어두운 시간은 바로 해뜨기 직전’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어둠은 단순한 어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어둠의 시간’ 없이 ‘밝음의 시간’만 경험한 적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둠이 짙을수록 밝음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무언가를 깨닫는 것도 어느 정도의 ‘어둠’ 혹은 ‘절망’을 경유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도 이 절망이 시간, 이 어둠의 시간을 경험하지 않고 부활의 영광을 맛볼 순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둠과 빛, 죽음과 부활의 연관성! 이것은 ‘삶의 이치’이자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생의 원리’입니다. 

유대 군중 속에 있는 나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성전 경비병들에게 잡히고 난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데, 오늘 이야기에는 좀 흥미로운 부분이 등장합니다. 그에 앞서, 먼저 오늘 본문의 상황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듯이, 예수께서 성전 경비병들에게 잡혀 온 이유는 예수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었기 때문입니다(요 19:7). 그리고 그런 새로운 권위를 못 견딘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처형하라는 장면이 이어서 나옵니다. 

사실 우리가 이 부분에 있어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본다면,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 자신도 그 현장에 있던 유대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말입니다. 아마 이곳에 계신 분들 가운데에 이 영화를 보신 분들도 많을 텐데, 그해 이쯤 개봉했던 영화 중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전, 그의 마지막 12시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뭐였냐면, 잔인한 장면으로 유명했던 예수의 그 처형장면이 아니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 사이에 서 있던 제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제가 배우로 출연한 건 아니지만, 당시 영화를 보며 느꼈던 가장 솔직한 심정은 저는 군중 속에 있을 때 혹은 다수에 속해 있을 때 엄청난 안정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 예수가 지금 내 눈앞에 없었기 망정이지, 만약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면 나 또한 유대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바라바와 예수

그런데 제가 아까 오늘 본문 가운데 좀 흥미로운 부분이 등장한다고 했었는데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흥미로운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먼저 18장 후반부를 보면, 성경에는 유월절마다 행해지는 관례가 있다고 나오는데, 유월절 관례는 매해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것을 말합니다. ‘특사(特赦)’와 같은 개념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어쨌든 그해 유월절에 유대 사람들 앞에 죄수 두 명이 서게 됩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듯, 한 사람은 ‘바라바(Barabbas)’라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예수’입니다. 마가복음(막 15:7)을 보면, 바라바는 유대에 폭동이 있던 당시 살인을 했던 인물로 그려지고 있고,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었던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를 시기한 대제사장들이 유대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라바를 놓아주게끔 했다고 이야기합니다(막 15:11). 대제사장들은 새로운 권위,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이 새로운 권위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런 그들의 말에 현혹된 유대 사람들은 두 죄수 가운데,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놓아주라 강하게 요구하게 됩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넘긴 자기 의지

그런데 오늘 제가 성경 본문을 읽을 때 빼고, 지금 한 이야기 중에 계속 한 인물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게 누군지 혹시 눈치채셨습니까? 바로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유대 땅을 관장하던 로마의 다섯 번째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최종 결정권의 소유자로서, 2천여 년 전, 이 단 한 번의 결정으로 대륙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참 불쌍한 인물입니다. 

그가 예수를 처형한 장면이 복음서마다 잘 묘사되어 있는데요.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을 보면, 빌라도는 유대 사람들에게 아주 흥미로운 말을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4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나는 당신들이 그것을 알아주길 바라오.” 

 

빌라도는 유대 사람들을 향해, 자신은 이 예수라는 인물에게서 아무런 죄도, 이상한 점도 찾지 못했다고 말하며 당신들은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게 된 것은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유대 사람들의 ‘권유’에 못 이겨 결정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건, 빌라도의 이 말이 4절에만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4절을 포함해 두 번 더 이런 말이 나오는데, 18장에 한 번(요 18:38), 오늘 본문 6절에 한 번 더 등장합니다. 결국, 다시 말해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예수의 처형을 결정한 것은 자신이 원해서라기보단, 여기 모여 있는 유대 사람들 당신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씩이나 예수에게서 십자가형을 내릴 만큼의 어떤 죄도 찾지 못했다고 말하며,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빌라도 자신이 아닌 유대 사람들 당신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앎과 결정 사이의 간격

그런데 물론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예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 죽지 않았어도 다른 어떠한 방식으로든 ‘죽음의 길’을 갔을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예수의 죽음이 이 세상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본다면, 예수의 죽음이 당연한 죽음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은 반드시 진행됐어야 할 어떤 필연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뭇사람들에겐 신약성경의 대표적인 죄인 두 사람, ‘유다’와 ‘빌라도’는 하나님이 그려가는 역사 가운데, ‘악역’을 맡은 자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을 염두에 두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실 저는 빌라도를 이해하고자 했을 때, 처음에는 그의 죄가 정확히 무엇인지 잘 알아차리기 어려웠습니다. 왜냐면 그는 성경에 세 번씩이나 언급될 만큼 예수에게서 기존 예언자들과는 다른 무엇을 느꼈고 또 그는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를 통해 새로운 ‘왕’의 면모를 발견했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태도에서 외면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보였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도 몹시 불편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빌라도에게서 죄의 한 형태 즉, 죄인 된 면모를 찾게 된 것은 ‘그의 앎’과 ‘그의 결정’ 사이에 있는 커다란 유격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유대 군중이 느끼지 못한 다른 어떤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예수와 나누었던 짧지 않은 대화에서 ‘참된 빛’, ‘진리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통해 느끼고 경험한 바를 끝까지 고수하지 못한 채, 타인들의 시선과 판단에 휩쓸려 결정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는 몹시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는 수많은 군중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이,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바를 끝까지 고수하는 것보다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마음속, 일렁이는 진실을 외면한 채 예수를 유대 사람들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는 어쩌면 정말 극악무도한 인물이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물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죄인이 될만한 실마리 혹은 죄인 된 모습의 형태를 보게 되는 건, 그가 군중에 휩쓸려 자신의 결정이 후대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깊이 숙고하지 않고 또 그 고민의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미뤘다는 사실을 통해서입니다. 

 

빌라도와 아이히만

여러분, 혹시 빌라도의 모습을 보며 이와 유사한 한 사람, 우리와 동시대를 공유하며 살았던 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이 아이히만은 독일의 정치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됐는데요. 그는 독일 나치의 친위대 장교였습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과 독일 점령 아래에 있던 유럽 각지의 유대인들을 체포하고 강제 이주시켰으며 나치 정권을 유지했던 중요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화자가 된 건 그가 지닌 ‘일반성’ 혹은 ‘평범함’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길, 악행을 저지르고 누군가를 괴롭히는 사람은 그 근본부터 뭔가 다르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도 이 아이히만을 바라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유대인의 목숨을 빼앗는 일에 앞장섰던 그는, 분명 ‘광신자’이거나 혹은 ‘반사회성 인격장애자’ 일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패배하고 난 후, 아르헨티나에 15년간 숨어 살던 그는 1960년, 비밀 정보원들에 의해 체포를 당했고 이스라엘 법정에 서게 됩니다. 한나 아렌트는 <뉴요커>라는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아이히만 재판에 참석하게 되고, 재판장 안에서 아이히만의 진술을 보며 우리도 잘 알고 있는 그 유명한 개념을 책에 기록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악의 평범성’입니다. 

생각의 무능이 죄다.

그가 법정에서 했던 이야기는 빌라도가 취한 태도와 매우 유사합니다. 법정에서 나눈 이야기 중, 핵심 부분만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판사가 이렇게 묻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까?” 그는 답합니다.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제 손으로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제 권한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시키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 하나의 인간이자 관리자였을 뿐입니다.” 

아이히만은 가스실이 달린 열차를 개발한 인물이자 수백만 명의 죽음을 방관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시 판사는 묻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은 없었나요?” 다시 그는 답합니다. “월급을 받으면서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를 지켜본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이런 판정을 내립니다. “그는 나보다 더 정상이며 준법정신이 투철한 국민이었다.” 그렇게 8개월간 재판이 계속됩니다. 그 지루함 속에 재판을 참관하는 사람들은 떠나갔지만, 끝까지 이 광경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말했습니다. “그는 아주 근면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녀는 말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과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여러분, ‘악함’은 머리에 뿔 난 도깨비나 특별한 악마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괴물 같은 행위를 했다고 하여 그가 처음부터 괴물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선함’과 ‘악함’이 공존합니다. 유대인들 눈에 극악무도한 악마로 비친 아이히만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 명의 평범한 인간이었습니다. 생각하기를 멈춘 전문가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며 느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서에서도 빌라도는, 예수의 사형선고를 피하려고 노력한 동정심 많은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사형에서 구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물론 스퐁(spong) 주교는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가 ‘예수 이야기’를 절정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한 문학적 구성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만, 어쨌든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앞세운 결정을 내리지 않은 빌라도, ‘진리의 음성’ 또는 로마 황제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권위’를 느꼈음에도 결국 이를 외면한 빌라도의 태도를 우리는 볼 수 있었습니다. 

알아주길 바라지만 말고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의 어떤 마음을 하나님께서 알아주길 바라십니까? 빌라도는 유대 사람들을 향해 세 번이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나는 당신들이 그것을 알아주길 바라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내면 교사의 가르침, 그 하나님의 음성을 용기 있게 직면하고 섬세하게 귀 기울여야 합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하는 일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를 통해 새로운 권위, 참 자유케 하여 생명을 살리는 새로운 권위를 느꼈음에도, 이를 외면한 채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믿는 바를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부단히 애쓰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는 분도 이러할진대, 우리라고 단번에 거룩한 삶을 살아 낼 수 있겠습니까? 때론 헛짚고 비틀거림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가리켜 보이는 길을 선택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은 ‘사랑을 향한 선택’이어야 합니다. 담임 목사님께서도 설교 중에 인용하셨는데, ‘불법보다 무서운 것이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빌라도 자신은 율법 뒤로 숨고, 예수는 마치 불법을 저지른 자처럼 꾸며 처형했습니다. 사랑은 자신이 해야 할 수고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깊어지고 넓어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둘러싼 갑옷 즉, 자아가 많이 깨져야 하는데, 갈수록 그러한 자발적 수고를 하는 사람은 적어 보입니다. 

성금요일을 맞은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떠하십니까? 부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의 시간을 경유해야 합니다. 빌라도는 이를 외면하여 유대 군중 속으로 숨었고, 예수께서는 묵묵히 고독 속에서 그의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은 부활을 맞이하기 전, 가장 어둠이 짙은 날입니다. 어둠이 곧 빛으로의 초대임을 기억하시되, 내가 감당해야 할 삶의 몫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몫을 주님의 도우심으로 잘 감당해 내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드려진 말씀을 위해, 함께 <거둠의 기도> 드리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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