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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사랑한다면 투쟁하라: 삼손

20191030 청파교회 수요 성서학당

사랑한다면 투쟁하라: 삼손

 


안녕하세요! 혹시 여러분께서는 어렸을 때나 젊었을 때, 여러분을 사로잡았던 ‘인물’이 있었나요? 실존 인물이나 성경 인물, 영화 속 인물, 소설 속 인물 누구든 좋습니다. 

저는 몇 해 전, 저를 사로잡았던 소설 속 인물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소설 속 인물이었던 ‘조르바’였습니다. 저는 그의 책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가 엄청난 흥분감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습니다. 읽어보신 분 계신가요? 

지금도 그런 성향이 우세하지만, 저는 여전히 두루두루 원만하고 완만한 사람입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로 부모님 속 섞인 적은 있었어도, 없던 일을 만든다거나, 부모님 생각에서 크게 벗어난 행동을 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 저의 모습 전부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잠잠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저를 뒤흔들었던 인물이 있었는데, 대표적 인물이 바로 ‘조르바’였습니다. 그는 제 안에 저도 모르게 숨겨왔던 ‘내적인 힘’ 혹은 내 안에 ‘감춰진 본능’을 직면하게 했고 또 무언가를 일깨우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작가는 ‘조르바’를 일러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모든 추상적인 관념에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살아 있는 하나의 육체를 부여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관념에 육체를 부여한 존재라. 정말 멋집니다. 

그러니까 왜 우리가 평소 ‘지당하신 말씀’과 같은 이야기를 자주 듣지 않습니까? 좋은 이야긴데 뻔한 이야기 같은 것들 말입니다. 사실 소설의 문맥상, ‘조르바’는 글을 쓰는 사람들을 겨냥해 이 말을 했던 거였는데요. 간단히 말하면 이 말은 이런 말일 겁니다. 인생에 있어 정말 중요한 건 ‘말’과 ‘글’보다, 무언가를 살아내는 ‘삶’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살아내는 만큼 느껴지는 삶

사실 이 말은 니체라는 철학자의 이야기에서 온 말이라 볼 수 있는데요. 왜냐면 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니체도 이와 관련해 아주 흥미로운 말을 했었죠. 이런 말입니다. “나는 모든 글 가운데서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미워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p.63) 

그러니까 이 말은 매일 우물 안에만 갇혀 뭐하냐고 말하는 겁니다. ‘삶’이란 자신이 살아내는 만큼 느끼고 깨닫게 되는 건데, 그만 고상한 척하고 내 안에 있는 ‘내면의 힘’을 믿고 밖으로 나가 생을 만끽하라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나가시면 안 됩니다!) 저는 물론 모태신앙이라 ‘성경 이야기’를 먼저 듣고 자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경험들이 쌓이고,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더해져, 성경을 보는 저의 시선을 확장 시키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어쨌든 이왕 <그리스인 조르바> 이야기가 나왔으니 소설의 대목 한두 개를 더 들려드릴까 하는데요. 

먼저 이 이야기입니다.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p.312) 이 말은 서두에 인용한 말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이 글귀도 저를 산티아고로 떠민 글 중 하나인데요. 조르바는 ‘머리’로만 무언가를 안다고 말하는 소설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망치와 같은 말인데요. “그래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p.322) 

대체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때, 뭘 안다고 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이 말은 흡사 성경에 나온 이야기와 아주 유사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16절에 나온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말씀과 유사한데요.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꼭 이 말씀만 아니어도, 오늘 이 소설의 이야기는 성경 전반에 흐르는 핵심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삶에 대한 경축’, ‘불의에 대한 저항’ 등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나실인 삼손

오늘 서론이 길었는데요. 사실 이렇게 인간이 가진 ‘야성’을 보여준 성경 인물 하나가 있죠. 그게 누굽니까? ‘삼손’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사사기 13장부터 시작되는데요. 오늘 잠시 삼손에 관해 살펴볼까 합니다. 

‘삼손’하면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르십니까? 무한한 힘, 자유분방함, 대담성 등이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잠시 살펴보면요. 그는 날 때부터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뭐라고 부르죠? ‘나실인 또는 나실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나실인’은 히브리어 단어 ‘나지르(נזיר)’에서 왔는데, 그 의미는 ‘거룩하게 되는’ 또는 ‘분리된’ 입니다. 

어쨌든 그는 아주 힘이 셌는데, 그가 가진 힘은 하나님에게서 왔고, 그 ‘힘의 목적’은 이스라엘 민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성경의 스토리가 재밌는 점은 하나님께서 삼손을 ‘방황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역시 사랑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삼손은 첫눈에 반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였나요?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블레셋의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엄청 신화적인 상황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부모와 함께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러 가는데, 동물 하나를 만나죠. 그게 무엇이었나요? 어린 사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사자를 어떻게 했습니까? 염소 새끼 찢듯이 찢어 죽였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그의 ‘힘’과 그가 가진 ‘잠재력’ 또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심’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수께기 사건

그는 어려움 없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 결혼식에서 또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게 뭘까요? 수수께끼를 하나 내게 되죠. 결혼식에 온 손님들이 일주일 안에 그 수수께끼를 풀면, 삼손이 그들에게 ‘모시옷(속옷) 30벌’과 ‘겉옷(예복) 30벌’을 주어야 했고, 그렇지 못하면 반대로 손님들이 그 옷들을 삼손에게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손님들이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기에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기 시작합니다. 어서 신랑을 속여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 자기들에게 알려달라고 말합니다. 결국, 아내가 울며 졸라대자 삼손은 그녀에게 답을 말해주게 되고, 그녀는 정답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삼손은 몹시 화가 나, 어떤 한 마을로 내려가 그곳의 주민 30명을 죽여 그들의 옷을 취해 수수께끼를 푼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는 자기 결혼식에 들러리로 온 어떤 친구의 아내가 되게 됩니다. 

다사다난한 삼손 인생

그리고 다음 이야기가 전개되죠. 사실 이 삼손은 힘만 셌던 게 아니라, 굉장히 ‘자유로운 발상’으로 가득 찬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여우 300마리를 붙잡아 두 마리씩 짝을 지어 꼬리를 묶은 뒤, 그 꼬리 사이에 홰를 매달아 불을 붙입니다. 그리고 이 여우들은 불타는 홰를 달고, 온 들판과 포도밭과 농장을 태워 버립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에서는 ‘자기 민족(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을 붙잡아 블레셋에 넘기려 했을 때, 그는 자신을 묶고 있던 사슬을 끊고, ‘당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명을 죽이게 됩니다. 이런 부분이 우리의 기억에 아주 오래 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삼손은 다시 ‘블레셋 여인’이었던 ‘들릴라’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되고 그녀의 속임수에 넘어가 자기 힘의 원천을 잃게 됩니다. 그의 힘의 원천은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자신의 ‘머리카락’이었습니다. 머리를 깎으면 그는 힘을 잃고 약해져서 평범해지게 됩니다. ‘들릴라’는 결국 삼손을 속여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고 삼손은 힘을 완전히 잃게 되죠. 

하지만 눈까지 뽑혔던 삼손은 감옥에 갇혀 있다가, 다시 자란 머리카락으로 힘을 얻게 되고, 사람들이 모여 있던 ‘(다곤) 신전’의 기둥을 뽑아 건물을 무너뜨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① 삼손: 전사

사실 초대교회에서 삼손의 이 ‘영웅담’은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삼손의 모습에서 몇 가지 특징을 볼 수 있는데요. 첫 번째는 특징은 ‘전사의 이미지’입니다. ‘전사’하면 괜히 대단해 보이는데요. 긍정적인 의미에서 ‘전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도하는 인간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기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스스로 삶을 책임지고 또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너무 의존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기대에 선을 그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도 하는데요. 어쨌든 주도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때론 갈등을 겪으면서 성숙해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의 기대에 어느 정도 선을 긋고 살아가려 하십니까? 

② 삼손: 전능하지 않은 자

그리고 삼손의 두 번째 특징으로는 ‘삼손은 전능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는 약점이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약점이 우리가 잘 아는 ‘머리카락’입니다.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도 ‘뒤꿈치’의 약점이 있었고, 북유럽 신화 속 영웅 ‘지크프리트’라는 인물도 ‘어깨’의 약점이 있었습니다.

삶을 열정적으로 살려는 사람이나, 삶의 의지나 의욕이 강한 사람은 ‘실수’하거나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런데 갈수록 사람들은 실수나 상처가 두려워 소극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패하게 되면,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진정한 삶’을 살려는 사람,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피하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알셀름 그륀 신부는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도 말씀드리긴 했는데, 살면서 ‘의도적으로 실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했었습니다. ‘실수’로 시작된 것이 ‘성장’과 ‘성숙’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완벽한 삶은 없을뿐더러, 완벽은 곧 권태와 지루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③ 삼손: 사자를 길들이는 자

세 번째 삼손의 특징은 삼손은 사자를 길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자’라고 하는 것이 내 안에 있는 어떤 ‘공격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요. 삼손이 사자를 길들였다는 말은 ‘자신의 공격성’을 잘 다루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수수께끼 놀이에서처럼, 힘으로만 싸우지 않고 머리(이성)로 싸우기도 합니다. 

④ 삼손: 독립한 자유인

그리고 네 번째 삼손의 특징은 그는 남들과 친구들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친족의 틀’에서 독립한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이익 관계’로 얽힌 집단과 단체에서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가족으로부터의 ‘경제적 독립’ 혹은 ‘정서적 독립’은 매우 중요합니다. ‘경제’는 물론 생활과 관련된 것이고 ‘정서’는 심리적인 것,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마무리

오늘은 삼손에 관해 살펴봤습니다. 그는 전사였고 약점이 있는 자였으며, 자신을 잘 살피는 자이자 자유인이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러한 가능성이 다 있고, 누가 내 안에 있는 이러한 것들에 관심 갖고 물을 붓느냐에 따라 하나님과의 친밀성도 더 높아지리라 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

문학과 여행 그리고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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