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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오후 예배] 삭개오를 만난 예수

20190609 청파교회 주일오후 예배설교

삭개오를 만난 예수

<누가복음 19장 1-10절>

1.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2.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3.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4.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6.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7.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10.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예외와 우연

안녕하세요. 오늘 이 주일 오후 집회가 담임 목사님 <성경 강의>로 알고 오신 분들이 대부분이실 텐데, 그런 분들은 좀 당황하셨으리라 봅니다. 오늘은 목사님의 지난 강의도 한 꼭지가 막을 내렸고, 또 약간의 쉼도 필요하시기에, 이렇게 막내 부목사가 출동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규칙은 예외가 있기에 특별해지고, 약속이란 깨질 때 우연이 발생한다는 말말입니다. 바라기는 짧은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예외의 은총’, ‘우연의 감동’이 있길 바라봅니다. 

말씀 한 구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10절까지 말씀입니다. 제가 대표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2.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3.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4.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6.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7.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10.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익숙한 본문의 다양한 층위

이 시간 함께 살펴볼 말씀은 <누가복음 19장>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는 삭개오와 예수가 만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교회학교 때부터 많이 들었기 때문에, 특히나 잘 아는 본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설교준비를 할 때, 잊지 않으려는 원칙 하나가 있습니다.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이 무엇이냐면, 누군가 설교의 서두를 들었을 때, 말미의 이야기가 예상되는 그런 설교는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담임 목사님도 가끔 말씀하시지만, 사실 누군가 하는 ‘지당한 말씀’이나 ‘뻔한 이야기’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기 마련입니다. 

물론 매번 이러한 원칙을 지키는 게 쉽지는 않지만, 특히 더 어려울 때가 언제냐면, 바로 오늘처럼,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의 본문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아무리 읽고 묵상해 봐도, 말씀의 다양한 ‘층위’ 혹은 어떤 ‘결(layer)’들이 느껴지지 않을 땐, ‘그저 그런 이야기’ 혹은 ‘뻔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물론 ‘진리’라고 하는 것이 ‘단순함’이라는 걸 모르진 않지만, 적어도 저 스스로 듣고 싶어 하는 설교를 준비하자는 게 제 원칙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삭개오와 예수가 등장하는 오늘의 말씀은 참 난간한 본문이긴 합니다. 삭개오하면, 곧장 ‘그의 절박함’ 또는 ‘예수의 은혜’로 끝나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말씀의 향방을 조금 열어두고, 오늘 본문을 살펴볼까 합니다. 

세관장 삭개오

먼저 예수께서는 여리고로 들어가 길을 걷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지나가는 그 타이밍에, 삭개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성경에는 삭개오가 ‘그곳에 있었다’고 단순히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 그는 우연히 예수가 지나가는 현장에 있었다기보다는, 스스로 그곳을 찾아온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3절을 보면, 그가 예수를 보기 위해 어떤 행동을 즉각적으로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 본문에 명확히 나와 있듯이, 직업은 ‘세관장’이었고 그런 직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쪼들림 없는 ‘부자’였습니다. ‘세관’은 세금 징수의 일을 맡아보는 관리를 말하는데, 삭개오는 세관 중에도 우두머리인 ‘세관장’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세청장’쯤 될 런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가지 ‘세금제도’에 시달렸는데, 한 가지는 이스라엘 성전 제사장들을 위한 ‘종교세’였고, 다른 한 가지는 자국을 위한 ‘국세’, 마지막 한 가지는 로마 제국을 위한 ‘제국세’였습니다. 없는 재산에, 이토록 과도한 세금마저 감당해야 했던 서민들은 토지를 빼앗기기까지 했는데, 세금 관리인인 ‘삭개오’가 미움의 대상이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절박한 사로잡힌 삭개오

그런데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조금의 부족함도 없던 삭개오가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사는 동네를 지나간다기에, 그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여 길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려진 예수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를 둘러싼 무리를 앞질러,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를 만나고 싶었던 어떤 ‘간절함’이 지금 우리가 느낄 정도이고, 그런 그의 ‘절박함’이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나무 위로 오르게 했습니다. 

계속해서 무리들과 길을 걷던 예수는, 나무 위에 올라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삭개오를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향해 어떤 군더더기의 말도 없이, “오늘은 내가 너의 집에 묵어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생략돼 있는 부분은 상상을 가미해 봐야 하는데, 과연 예수께서는 삭개오의 무엇을 보았고 또 무엇을 느꼈기에 방금과 같이 말씀하셨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순수함의 부정성

예수의 이 말씀을 들은 삭개오는 자신의 체면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나무에서 내려와 기쁨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십니다. 그러자 이제는 오히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죄인과 어울리며, 그의 집에 묵으러 갔다는 말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수의 순수성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아랑곳 않고 자신의 선택을 밀어붙입니다. 

여러분, 혹시 ‘순수함’이란 단어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어렸을 때, 들었던 말 중에, “너 대게 순수하다.”, “너 정말 순수한 거 같아.”라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맑고 깨끗한 이미지는 늘 좋아 보이기 마련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실제로 순수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순수하게 여겨지는 것’ 자체가 기분 좋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순수하다’라는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견디기 힘든 어떤 ‘감옥’ 같은 표현으로 느껴졌습니다. 왜냐면, 시간이 지나며, 내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욕구들’을 대면했기 때문이고, 생각할수록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순수하다’라는 말은 ‘무지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는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고전 가운데, <헤르만 헤세>의 책들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요. 혹시 여러분께서는 ‘밝은 곳’에서만 살았던 사람 또는 ‘어둠의 그늘’이 없는 사람과 만나보셨습니까? 그런 사람을 만나면, 어떤 ‘답답함’과 지나친 ‘완고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안전하고 편안하게만 살았던 사람들은, 작은 바람과 충돌에도 쉽게 흔들리는 걸 보게 됩니다. 

물론 ‘어두운 곳에서만 살았던 사람’, ‘어두운 경험만 가득한 사람’도 좋은 경우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던, 원치 않던 삶의 고난을 많이 겪었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선을 향한 의지’라던가 ‘밝음에 대한 동경’ 없이 살게 된다면 그것 또한 좋은 ‘삶의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덜 순수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덜 순수하다는 건, 자기 안에 밝음과 어둠이 공존함을 인정하고 그 두 선택 가운데, 더 나은 선택을 해나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무엇이 어둠이고 무엇이 밝음인지 더 자세히 나눠보면 좋을 듯합니다. 

아무튼 삭개오와 함께 간 예수를 보며, 그의 순수성을 의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대가 어긋나자 예수와 일행을 떠나갔습니다. 

마음이 원해서

그리고 이어지는 8절을 보면, 상황이 급변하여 <삭개오의 집>이 등장합니다. 삭개오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뜬금없이 이런 말을 내뱉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8절 이전을 보아도, 예수께서는 특별히 어떤 질문이나 훈계도 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가 의도적으로, 예수의 질문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그보다는 처음부터 삭개오를 취조했을 법한 예수의 질문들은 없었다고 보는 게 더 나을 듯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 이야기가 더 의미 있고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 삭개오는 뜬금없이 예수에게 고해성사라도 하듯,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게 된 것인지를 말입니다.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듣던 예수는, 다른 어떤 추임새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삭개오의 두 가지 행동

오늘의 이야기에서 우린 삭개오의 두 가지 행동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과 다른 한 가지는 스스로 ‘자신의 결백함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알아서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삭개오가 한 행동은 누군가 시켜서 한 행동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삭개오로부터 어떤 상태 하나를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간절함’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는 형편도 남 부러울 것 없던 그인데, 그는 모든 체면과 신분마저 내려놓고 예수를 만났고 그를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우리는 주로 오늘 본문을, ‘삭개오의 믿음’ 혹은 ‘그의 간절함’ 같이, 삭개오의 마음 상태에 중심을 두고 읽어왔습니다. 물론 이 또한 굉장히 중요한 관점이자 중심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우리의 시선을 예수께 돌려보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의 행동과 그의 이야기로부터 ‘본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삭개오의 마음’을 읽어냈습니다. 삭개오라는 한 영혼이 살아온 지난 삶을, 자신의 ‘온 몸’으로 느끼셨습니다. 그의 ‘절박함’을 보아냈던 것입니다. 

현재를 읽어낸 예수

아마 평소 삭개오가 입고 다녔던 옷은 일반 서민들의 옷과는 달라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옷’과 관련된 ‘신분의 격차’를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꽤 높은 위치에 있던 그가, 나무를 타고 올라가, 그 위에서 뭔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께서는 단번의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삭개오가 자신의 집에 기꺼이 맞아들이는 것도 모자라, 본인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그 진솔한 모습을 보며, 삭개오에게 뭔가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보아내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의 표정, 행동, 말투를 보며, 한 영혼 안에 담긴 ‘현재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느끼고 공감하였습니다.  

모자(母子) 이야기

얼마 전, 친구를 만나러 카페에 갔었습니다. 조금 일찍 도착해 책을 읽고 있는데, 가까운 테이블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옆 테이블에 6-7살 정도로 보이는 ‘한 남자 아이’와 ‘아이의 엄마’가 앉아 있었는데, 아이는 문제지를 풀고 있었고, 엄마는 지도와 채점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아직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잘 몰라 그러는 것일 수도 있는데, 엄마는 엄마 나름의 방식으로 ‘채점’과 문제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었고,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엄마의 ‘지도’를 받아 문제 ‘풀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들으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가만히 들려온 아이와 엄마의 대화에 제 마음이 불편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괜한 ‘오지랖’이 작동했던 모양입니다. 

제가 느끼기엔 그랬습니다. ‘엄마’는 아이의 마음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문제를 풀다가 엄마의 지적에 기분이 상했어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문제풀이를 계속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두 사람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간격’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옳고 그름은 누군가 대신 판단해 주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만, 제가 두 모자(母子)에게서 느낀 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이해의 폭’이 이렇게나 넓은데,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온전히 느끼고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라는 것이었습니다. 

 

타인은 지옥이다

여러분, 혹시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계신가요? 아니면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했던 때를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의 ‘생각’과 ‘마음’을 모두 알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그게 잘되시던가요? 혹은 부모님이나 자녀들이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아 속상했던 적은 없으셨나요? 

사실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우리는 평생가도 ‘한 존재의 깊은 내면’에 가닿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죽고 못사는 연인들도, 상대에 관해 알아가려고 노력할 뿐, 상대의 모든 것에 관해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타인이 지옥처럼 나쁜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누군가를 알아가는 과정을 살 뿐, 평생가도 한 사람에 관해 다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니, 왜 저 사람은 내 마음을 몰라주지?”라거나 “아니, 저 인간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야?”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쩌면 인간으로써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릅니다. 

그럼 우리가 가진 이러한 한계 속에, 두 가지의 선택만이 남게 됩니다. 더 이상 상대에 대해 알기를 포기하고 돌아서거나, 아니면 계속해서 알아가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거나 말입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주로 ‘전자’의 선택을 합니다. 그래서 적당히 알고서는 다 안다고 쉽게 판단해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어떠하셨습니까? 그는 자신을 따른다고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해 버린 그 제자들마저도, 저주하지 않고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평생 무언가를 ‘추구하는 자’로 사셨지, 한 번에 모든 것을 ‘완성시킨 자’는 아니었습니다. 

‘기도’와 ‘사람 만나기’ 훈련

다시 삭개오의 이야기로 넘어오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삭개오의 ‘간절한 마음’이나 ‘태도’보다, 예수의 ‘시선’ 혹은 타인의 ‘마음’을 보아내는 그분의 능력에 집중해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의 행동과 말로부터 그의 ‘과거’, 그의 ‘내면의 상태’를 읽어내셨습니다. 예수의 눈에 삭개오는 뭔가 불안해보였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지난 삶에 대한 ‘회의’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고독감’ 같은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삭개오의 과거를 보지 않으시고 ‘지금, 현재’ 자신 앞에 있는 그를 편견 없이 보았습니다. 

저는 예수께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라고 한다면 너무 허무해집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셨던 예수도 반드시 어떠한 ‘애씀’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도 ‘신앙생활’의 한 단면이기에 ‘훈련’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집중적으로 한 훈련은 ‘기도’와 ‘사람 만나기’였습니다. 그는 매일 조용한 곳으로 나아가 홀로 기도하셨고, 또 그 ‘기도의 힘’으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끊임없는 일치를 이루기 위해 애쓰셨고, 또 그 사랑의 충만함으로 경계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평소 내가 ‘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새롭게 보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 자기가 알던 사람도 늘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삭개오의 무너진 마음을 읽어냈고, 새로운 존재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던 ‘내면의 눈동자’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예수를 만난 삭개오>가 아니라 <삭개오를 만난 예수>로 정해봤습니다. 뭐가 다른가 싶으시죠? <예수를 만난 삭개오>는 삭개오의 ‘간절함’과 ‘절박함’에 그 중심이 있는 것이고, <삭개오를 만난 예수>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냈던 예수에게 그 중심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반복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는 주로 삭개오의 믿음, 그의 간절함만 볼 뿐, 예수께서 삭개오를 구원한 그분의 ‘섬세한 마음’을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우리 인생의 길잡이로 삼는다면, 우리도 예수가 사람을 바라보던 그 ‘눈동자’를 내면에 지녀야 할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이웃들을 바라볼 때나 또는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에, 삭개오를 바라보던 ‘예수의 그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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