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2 청파교회 2부 설교
내 영혼의 열망
<시편 42편 1-5절>
1.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니, 내가 언제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 얼굴을 뵈올 수 있을까?
3.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나를 보고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비웃으니,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이 나의 음식이 되었구나.
4. 기쁜 감사의 노래 소리와 축제의 함성과 함께 내가 무리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면서 그 장막으로 들어가곤 했던 일들을 지금 내가 기억하고 내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늘 우리는 대림절 네 번째 초에 불을 밝혔습니다. 이로써 모든 초에 불이 밝혀졌습니다. 모든 초가 불을 환히 밝히듯이 우리의 답답하고 어두운 현실도 밝게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나눔에 앞서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저마다 믿는 하나님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가 조금일 수도 있고,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던 하나님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조금씩 바뀌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 우리가 만나고 또 경험하는 하나님은 아주 분명한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물론 공평과 정의라는 말이 옳고 그름을 정확히 따져서 이분법적으로 삶을 나누자는 말은 아닙니다. 공평과 정의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곧 평화입니다.
그것은 이미 <이사야서>에서 증언된 바가 있습니다(사 65:25). 이사야는 말하기를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는 곳” 그리고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는 곳이 바로 평화의 세상이라고 말했습니다. 함께 어울려 살며, 서로 해치거나 상함이 없는 세상이 곧 공평과 정의의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특별하고 유별난 세상이 아닙니다. 누구나 욕심 없이 살고, 저마다 주어진 일상을 불안감 없이 살아낼 수 있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공평과 정의가 무너져갈 때, 다시 말해 일상의 평화가 무너져 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즉각 행동하라고 말입니다. 무너진 평화를 다시 세우라는 이 거룩한 소명 앞에 주님은 우리를 세우십니다.
적극적으로 행동한 인물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어긋나거나 하나님이 모욕을 당할 때,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하게 깨달아서 즉각적 행동을 취합니다.
먼저 모세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과 대면하러 간 사이에 지도자가 없는 그 불안감을 참지 못해 금송아지를 만든 백성들과 마주합니다. 그는 불안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을 보며 한탄합니다. 그래서 그는 즉각적으로 금송아지를 불에 태운 뒤, 백성들이 나눠 마시게 했습니다. 그들에게 우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드러내고, 회개하는 일에 동참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 자신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 기도를 드렸습니다(출 32장).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잡기 위하여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했습니다. 그는 그들과의 대결을 통해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임을 증명해 보였습니다(열상 18장). 바울도 적극적인 행동으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유대 기독교인들과 이방 기독교인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그 갈등 안에 참 생명이 없음을 알았기에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그 일을 막아서고자 애썼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무너질 때 혹은 하나님이 모욕을 당할 때, 그것을 막아서고자 아주 능동적으로 나선 인물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신앙을 지키려는 이들에게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지키고자 몸을 바친 이들 덕에 이만큼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머뭇거리는 사람들
그런데 저는 이번에는 이들만큼 중요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바로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진 않지만, 보이지 않는 속도로 변화하며, 꾸준히 주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사실 어느 모임에든 주목을 받고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은 대체로 외향적인 사람들입니다. 적극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며 활발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늘 주목받기 마련입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도 이러한 사람들이 많은 주목을 받고 칭찬을 받습니다.
하지만 잘 아시겠지만, 우리 주변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그렇게 변화 없는 자기 모습을 보며, 한심해하거나 부끄러워합니다. 그들은 대범하게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숨고 싶어 합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들의 어찌할 바 모르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다 살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변화하려고 애쓰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라지만 한계에 부딪쳐 허둥대는 사람들! 주님은 그들을 더 귀하게 여기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분들을 응원하고, 잘하고 있다고 격려하고 싶습니다.
서서히 변화된 인물들
사실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삶 자체가 그러한데 우리 인간은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인간의 내면과 생각은 훨씬 복잡합니다. 마치 광활한 우주와도 같습니다. 성경 인물 중에서도 극적으로 변화하거나, 하나님의 부름에 즉각 반응하지 않고, 서서히 변화된 인물들이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 일가가 그러합니다.
먼저 아브라함 자체가 그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완성된 인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택함 받은 게 아닙니다. 그는 갖가지 일을 마주하며 성숙해졌고, 서서히 변화되어 갔습니다. 아브라함이 겪은 일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그는 떠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갑작스러운 음성을 듣고 그는 안전의 세상에서 불확실의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 떠남이 그가 성숙해지고 변화되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후 조카 롯과 땅 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여종 하갈의 몸을 통해 얻은 이스마엘 때문에 자신의 아내와 여종의 갈등도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겪은 가장 큰 사건은 아들 이삭과 관계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뿐인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는 번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고 넓기에 그분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지’ 아니면 ‘아들을 죽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하면 되는지’ 이 둘 사이에서 번민합니다. 사랑은 아브라함에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점점 깊어졌고 점점 성숙해졌습니다. 그의 변화는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그야말로 천천히, 서서히 이루어진 변화였습니다.
다음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어머님 품 안에서 자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쉽게 말해 ‘홈보이’였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를 통해 형 에서의 축복을 대신 취하기도 하였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형으로부터 도망갈 기회를 얻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그리 쓸모 있는 사람으로 비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이 있는 하란을 향해 떠나는 그 여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미지의 땅, 불확실한 세계를 향해 한 걸음 내딛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있던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는 꽤 먼 거리였습니다. 야곱은 그렇게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며 깊은 고독과 마주하게 되었고, 그러한 홀로서기를 통해 그는 점점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져 갔습니다.
복음서에서도 이러한 변화의 인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러합니다. 베드로는 하늘의 열쇠를 손에 쥔 반석과 같은 사람이었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또한 종종 충동적이고 실수투성이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실 때, 그러한 일이 결코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마 16:22-23). 그는 하나님의 마음보다 자신의 마음이 더 앞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며 두려움에 떨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마 26:69-75). 그는 이러한 실수와 오해, 회피의 시간을 거치며 점점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이처럼 평가라고 하는 것은 과정 중에는 알 수 없고 늘 후대에 이뤄지는 법입니다.
바른 신앙인의 모습이란
저는 현재 속회가 있는 주간에는 청파1속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른 속회도 마찬가지겠지만 속회를 위해 모이면, 한 분 한 분 오늘 들은 설교의 말씀을 나눕니다. 그런데 많은 분께서 설교를 듣고 나눠주시는 말씀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 대한 아쉬움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쉽게 변화되지 않는 자신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하십니다. 열심히 말씀 묵상을 하려고 했지만, 늘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레위기라는 문턱에서 넘어진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과 더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자기 한계에 관한 이야기 등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속회원분들의 열망과 바람이 귀했고 또한 그런 나눔의 자리가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의 이상적인 모습은 따로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하고자 할 때, 단번에 실행에 옮기는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이 명하신 것이 있으면, 곧장 몸을 일으켜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막힌 것이 있다면 속히 풀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철저히 지키며, 잘못한 것이 있다면 곧장 잘못을 시인하는 것 등이 바로 이러한 것들입니다. 사실 예열 없이 뭔가를 바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몸을 바꾸는 행위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오늘 그 이야기까지는 다루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생각이라는 예열
사람은 보통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 행동보다 앞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생각이라는 예열을 하느라 제때 행동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실 정말 무서운 사람은 힘이 센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내린 결정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서두에 말씀드린 모세와 같은 사람, 엘리야 같은 사람, 그리고 바울과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모세와 엘리야, 바울을 예로 들긴 했습니다만, 이들이 위대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앞에 확실한 상황이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이 분명한 상황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난세에 영웅의 출연은 어쩌면 당연하고,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릅니다.
서두르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하지만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평소에 맞닥뜨린 상황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복잡미묘한 상황을 맞닥뜨리는 우리 인간은 훨씬 더 다층적이고 다면적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적극적인 행동파였던 모세와 엘리야, 바울보다는 변화의 시간이 충분히 필요했던 아브라함과 야곱 혹은 베드로를 더 많이 닮았을 것입니다.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면, 이런 이야기 나옵니다. 이야기의 화자는 우연히 나비가 번데기를 뚫고 나오려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는 번데기 앞에서 잠시 기다립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릴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번데기에게 따뜻한 입김을 불어줍니다. 그가 열심히 데워 준 덕분일까요? 번데기의 변태 과정은 빠르게 진행됩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화자는 곧 커다란 공포심에 사로잡힙니다. 번데기에서 나온 나비가 자신의 구겨진 날개를 펴려고 온몸을 떠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입김으로 나비가 날개를 펴는 것을 필사적으로 도우려 했으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그제야 그는 깨닫습니다. 나비가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그 행위는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음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시간이 흘러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서두르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영원한 리듬에 충실히 따라야 한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열망하는가
그럼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느리고 더디게 변할 뿐만 아니라 복잡미묘하게 만들어진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 신앙의 기초가 될 만한 그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열망입니다. 갈망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갈망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망이란 곧 방향을 뜻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뜻합니다. 만약 내 인생의 방향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있다면, 당장의 변화를 꿈꾸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 내 앞에 있다면, 예얼없이 즉각적으로 판단하고, 행동에 나서면 됩니다. 그러나 그 외의 것들은 잘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재촉하고 서두르게 하는 음성이 어디서 온 것인지 우리는 잘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많은 시편을 기록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갈망하며, 여러 편의 시를 지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기도 하였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이 가운데 특별히 시편 42편에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간절한 열망이 등장합니다. 그는 시편 42편 1절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1)라고 고백합니다. 이 ‘헐떡이다’라는 말을 개역개정은 ‘갈급하다’로 묘사하였고, 공동번역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 찬 상태입니다.
다윗이 정확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현재 그는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과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3). 그리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하나님의 성소로 향하는 길 또한 막혀버린 상태입니다(4). 그는 다급했을 것입니다. 조바심이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게 아닐까 염려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조바심 내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속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서두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영혼을 두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5,11) 그는 같은 시에서 두 번이나 이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반복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열망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불안감에 속지 않고, 지금 자신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잠잠히 돌아봤습니다.
내 영혼의 갈망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도 잘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통해, 이 땅에 평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야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장 변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고,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만 있다면, 주님께서 적절한 때에 반드시 우리를 통해 일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신뢰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지금 내가, 내게 주어진 수단으로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면, 우리는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커다란 변화가 아닌 아주 작은 변화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마25:21) 나아지되 아주 조금만 나아지십시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곧 모든 사람을 나타내듯이, 조금이란 수치는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닙니다. 어쩌면 잘 산 인생이란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는 그런 노력보다는 오히려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진 않을까 조심하고 염려하는 그런 세심한 인생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열망을 살폈습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유심히 살폈습니다. 그 마음 하나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참 그리스도인 되고자 하는 그 열망만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예수의 탄생을 앞둔 이 소중한 절기에 우리의 영혼이 무엇을 갈망하는지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나누는 말씀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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