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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에세이] 삶이란 배움터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사람은 앎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물론 그 욕구의 동기는 다양할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존재를 뒤흔드는 일의 발생 이후가 가장 강렬히 앎을 원하는 순간 아닐까. 토대를 흔드는 어떤 일을 겪게 되고 점차 시간이 흘러 마음의 흥분이 가라앉고 나면 사람은 자신에게 발생한 사건을 두고 이리저리 생각해 보게 된다.

 

어릴 적부터 개신교에서 성장해 온 터라 천주교와 불교는 늘 적대의 대상이었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얼굴이 너무나 붉어진다. 이웃 종교에게 죄송하고 미안할 따름이다. 하지만 어떤 배경과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다보면 내가 보고 느낀 세상만이 전부라고 여기게 된다. 정서가 그렇게 자리 잡혔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신이 위대한 사람도 정서가 뒤죽박죽인 곳에서 사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기존의 정서를 깨뜨리고 나오는 시간이 있었다. 가히 고통의 시간이었다. 토대를 새로 세운다는 건 확실한 모든 걸 내려 놓는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몇 달 전, 길 위에서 만난 한 인연 때문에 템플 스테이를 다녀왔다. 이웃 종교에 대해 머리로는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문제없는 듯했어도 그 생활 방식까지 경험해 볼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고 기회가 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개인의 정서가 밀어내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강렬했던 길 위의 인연에 의해 나는 주저 없이 템플 스테이에 동참했고, 타 종교인으로서의 신분을 숨긴 채 땀을 흘려가며 108배를 드렸다. 108배 기도를 한 번 배워봐서 그랬는지 잘 모르겠으나 나에겐 그 시간들이 배움의 시간이자 삶의 확장을 이루는 시간이었다. 사실 자신의 믿음이 이런 일의 발생에 요동친다면 그 신은 버리고 새로 믿는 게 맞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정상 사찰 안에 오래 머물진 못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짧았던 인연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일상에 어떤 인력(引力)이 발생했던 걸까. 그러다 문득, 인생은 배움터이자 놀이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의 토대를 흔들고, 일상에 균열을 내는 만남과 사건은 자신을 넓은 운동장으로 초대한다. 신나게 뛰다 보면 넘어져 상처를 입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전부를 감싸 안는 것이 놀이이자 배움인 것이다. 놀이와 배움에는 남녀노소도 없고 종교도 없다. 빈부의 격차도 없다.

 

다만, 삶이라는 배움터, 놀이터에서 입은 상처가 몹시 클 때가 있다. 그럴 땐 비틀거리는 사람을 부축할 친구들이 필요하다. 그 상처를 홀로 어루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상처의 크기를 함부로 재단할 순 없지만, 거대한 권력에 의해 입은 상처는 앎에 대한 욕구를 억압하고 또 억압한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경주 지진 등과 관련된 국민들의 상처와 미르재단•K 스포츠 재단을 둘러싼 모금, 성과 연봉제 등에 관한 국민의 앎에 대한 욕구가 흘러갈 곳이 없다.

 

하지만 삶이라는 배움터에서 마주한 이 거대한 불의 앞에 영혼이 잠식되어서도 안 된다. 니체가 말했듯이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 어려운 작업을 명랑하게 맞아들이며 살아내는 이들이 있다. 아무리 거대한 벽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삶을 배움과 놀이터로 여기는 이들의 기대를 꺾을 순 없을 것이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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