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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사랑한다면 투쟁하라: 요셉

20191016 청파교회 수요 성서학당

사랑한다면 투쟁하라: 요셉

 

안녕하세요. 뜬금없는 질문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안 좋은 일을 겪거나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저도 여러 가지를 시도하는 중인데요. 잠을 자기도 하고, 자극적인 영화를 보기도 하고, 누군가와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뭘 먹기도 하죠. 그런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방법은 ‘생각과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고요히 머무는 것입니다. 20분씩 타이머를 맞추고 고요히 머무는 시간을 갖는데요. 

대가들은 자주 내 안에 있는 ‘내적 공간’을 인식하라고 합니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그 공간에 주목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오죠. “당신의 내면에는 당신이 매 순간마다, 그 속에 파고 들어가 편안하게 안주할 수 있는 그런 고요한 은신처가 하나 있어.”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민음사, p.107) 

왜 이런 이야기를 드리냐면,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성경 인물과 관련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 인물은 외부로 시선을 돌리기보다, 자기 마음에 집중한 인물이었습니다. 

가족: 첫 사회화 현장

오늘 함께 나눌 인물은 누구일까요? ‘요셉’입니다. 

‘야곱’이 어머니가 아끼던 아들이었다면, ‘요셉’은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형제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아는 요셉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형들의 ‘질투’를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을 텐데, 그중 한 가지는 ‘부모님의 치우친 사랑’입니다. 특히 아버지인 ‘야곱의 편애’가 그러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당연히 부모의 영향에서 자유롭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가족’은 우리가 맞이하는 ‘첫 번째 사회화 현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부모님을 만납니다. 물론 부모도 그렇게 아이를 만납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과정을 겪기 때문에, 누구도 부모의 영향에서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야곱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아버지의 편애로 인해, 형들이 요셉을 경쟁상대로 느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꿈대로 믿고 행동

그런데 요셉은 이러한 상황에서 불 난 집에 기름을 붓죠. 사실 형들이 요셉을 질투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아마 단순히 아버지의 편애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뭔가 특별하게 여기는 요셉의 ‘태도’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맞추기보다 자신의 꿈대로 믿고 행동했습니다. 이것이 형들을 더욱 공격적으로 만든 이유이자 원인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건, ‘형제애’가 없어서였다기보다는,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를 살아 있게 만드는 삶의 원천, 삶에 필요한 자양분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원천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깊은 ‘무의식의 세계’ 혹은 ‘내적 영감의 세계’였습니다. 요셉은 ‘자기 내면’과 깊은 일치를 이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셀름 그륀 신부는 이를 통틀어 요셉이 지닌 ‘마술의 세계’라고 칭했습니다. 

첫 번째 죽음: 구덩이

이제 성경 속, 그의 이야기를 살펴볼까 하는데요. 형들이 양 떼를 돌보러 들판에 나가 있을 때, 아버지 ‘야곱’은 요셉더러 형들이 양을 잘 돌보고 있는지 나가보라고 합니다. 근데 이때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어떤 사건이었죠? 형들이 요셉을 죽이기로 모의합니다. 그동안 참아왔던 서운함과 질투가 뒤섞여 분출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장남이었던 ‘르우벤’이 요셉을 살려 아버지께로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그로 인해, 형들은 그를 죽이는 것을 포기하지만, 다시 어떻게 합니까? 그를 구덩이에 던져버리지요. 그리고 장사꾼 무리가 지나갈 때, ‘유다’는 ‘요셉’을 장사꾼들에게 팔아넘기자고 제안하죠. 여기까지가 요셉에게 일어난 1차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요셉은 첫 번째 ‘어두움’을 경험합니다. 이 경험은 ‘구덩이에 던져지는 경험’이었습니다. ‘구덩이에 던져진다.’ 이 말은 어떤 상징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구덩이에 던져졌다’라는 말을 들으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죽음’입니다. 요셉은 어두운 구덩이 속에서 첫 번째 ‘죽음’을 경험합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

여러분께서는 ‘죽음’ 하면 어떤 생각부터 드십니까? 죽음을 가까이 두는 건 늘 불편하죠. 왜냐면 ‘죽음’은 여전히 두렵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죽음이 두려운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우리의 ‘이성’ 혹은 ‘지성’으로는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에 집중할 수도 있고 또는 그것을 고대하면서 기다릴 순 있지만, 죽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지적으로 탐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 모두 처음 죽어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가 누구이든, 타인의 죽음은 내가 사는 세상의 한 조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나의 삶과 내 자신, 내가 인식하고 상호작용하는 세상 그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없으면 내가 인식하는 세계 자체도 없다.” (98) “타인의 죽음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사건에 지나지 않는 반면, '나'의 죽음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주체 그 자체의 소멸이다. 세상은 그대로 있는데 '나'의 존재만 무로 바뀐다는 것, 이것보다 더 처절한 상실이 있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100)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의길, p.98-100)

죽음과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는 두 사람

다른 책에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죽음’과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는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는데요. 먼저 한 사람은 여성으로 임사체험 전문가(near-death experience, NDE)였고, 다른 한 사람은 남성으로 무덤을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한 가지 견해에서 일치를 이루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냐면, ‘죽음’이란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사건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두 사람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지점은 두 사람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데 있습니다. 먼저 ‘무덤 파는 일’을 하던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자기 운명을 원망하지 않는 듯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육신이 약해지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 자꾸 웃음을 지었는데, 그러면서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제 집에 가고 싶어요.” 이 말은 당연히 이 땅에서의 집이 아닌, 죽음 이후의 집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 ‘무덤 파는 일’을 하던 사람은 깊은 신뢰 속에 미지의 세계로 나갔습니다. 

반면 ‘임사체험 전문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생을 놓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했는데도, 죽음을 마주하기 힘들어해서 누구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죽음에 관해 평생을 두고 공부했던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실제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워했습니다. 

죽음 앞에 좋은 도구가 아닌 ‘이성’

사실 이 두 사람의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죠. 우리의 ‘이성’이라는 게 ‘자기 죽음’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이 ‘자신의 죽음’을 대면하기에는 좋은 도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임사체험 전문가였던 그 여성은 ‘죽음’에 관한 어떤 일반적 개념에는 능통했지만, 자기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탈리 크납’이라는 독일 철학자는 이 여성의 사례를 보며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먼저 한 가지는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죽음에 가까이 가봤을 뿐 완전히 죽지는 않았었다는 것과 다른 한 가지는 타인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아주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유시민 작가의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죽음의 무턱까지 간 사람

여기 혹시 죽음이 덜 두려우신 ‘믿음의 조상님’ 계신가요? 실제로 다른 사람보다 죽음을 덜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겠습니까? 

죽음의 문턱 가까이 갔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사람도 완전히 죽어본 경험이 없기에 당연히 한계는 있겠지만, 그래도 매 순간 느끼는 바는 확실히 다를 겁니다. 혹시 여기 계신 분 중에 ‘죽음’을 가까이 둬봤던 경험 해보신 분 계신가요? ① 자신의 경험(질병, 사고 등) ② 지인을 지켜본 경험(임종, 사망 등) 

요셉이 바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었던 형들에게 배신을 당했고, 직접적인 죽음의 위기 속에 놓이게 되었었습니다. 그는 어두운 구덩이 속에 떨어졌는데, 이것은 몸에 가해진 상징적인 죽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가족으로부터 죽음에 내던져졌음을 느낍니다. 이때의 경험이 그를 고통 속에 빠뜨렸겠지만, 그가 더 성숙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요셉에게 일어난 2차 사건

요셉의 이야기를 더 이어 나가 보겠습니다. 장사꾼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데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의 경호 대장이었던 ‘보디발’에게 그를 팔아넘기게 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으로 요셉의 일들이 잘 풀리게 됩니다. 그는 직장까지 갖게 되는데, 그의 첫 번째 직업은 보디발의 재산을 관리하는 ‘재산관리인’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행운이 그리 오래가진 않습니다. 요셉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죠?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죠. 동침을 요구합니다. 사실 요셉이 좀 짜증 나는 건, 그의 용모가 ‘준수하고 잘생긴 미남’이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민감함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잘생겼대요. 뭔가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요셉은 하나님과 보디발에 대한 마음 때문에,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되죠. 

그런데 자신을 붙잡는 보디발 아내를 뿌리치다 그 현장에 자신의 겉옷 하나를 두고 가게 되죠. 그래서 그녀는 오히려 요셉이 자신과 동침하려 했다는 증거로 ‘요셉의 옷’을 두고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게 됩니다. 그녀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만했을 겁니다. 그래서였는지 적반하장(賊反荷杖)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보디발은 몹시 분노하게 되고, 요셉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에게 일어난 ‘2차 사건’입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두 번째 ‘어둠’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어둠’은 곧 또 하나의 ‘죽음’ 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요셉의 두 번째 직장

요셉은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다시 그의 재능이 발휘하게 되죠. 요셉은 감옥에 갇힌 죄수들의 꿈 해석을 해주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이 했던 그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힌 지 2년쯤 됐을 때, ‘바로’가 알 수 없는 꿈 하나를 꾸게 됩니다. 그런데 이 꿈은 이집트의 ‘모든 현자’와 ‘예언자들’이 해석을 할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이때 바로의 시종 하나가 요셉의 소문을 듣고 그를 ‘바로’에게 추천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바로를 만난 요셉은 그의 꿈 풀이를 해주게 됩니다. 그의 꿈 풀이의 내용은 대략 이러합니다. 이집트에 7년 동안 ‘커다란 바람’이 불 것이고, 뒤이어 다시 7년 동안 ‘기근’이 들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그래서 이 재난이 닥치기 전에 양식을 비축해 두라고 권면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요셉은 두 번째 직장을 갖게 됩니다. 바로는 요셉을 ‘나라의 재상’ 즉, ‘이집트의 총리’로 임명하게 됩니다. 빈털터리로 이집트에 온 요셉은 ‘보디발의 재산관리인’에서, ‘이집트의 총리’가 된 것이죠. 그는 이집트의 가장 권력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화가 복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로 인해, 타국에 기근이 든 동안에도 요셉의 창고는 곡식으로 가득 찼습니다. 

요셉의 테스트

요셉의 고향이었던 ‘가나안’에도 역시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요셉의 형제들은 곡식을 구하러 이집트까지 오게 되죠. 형제들과 마주친 요셉은 형들을 먼저 알아보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진 않습니다. 그리곤 요셉은 곡식을 구하러 온 그의 형제들에게 곡식을 내어주게 되는데, 조건 하나를 걸게 되죠. 형제 중 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나머지는 아버지가 있는 고향에 돌아가 막내를 데려오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이 막내의 이름이 뭐였죠? ‘베냐민’입니다. 처음에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이 죽임을 당할까 그를 데려가지 못하게 만류합니다. 그런데 기근이 점점 심해지는 까닭에 ‘베냐민’을 책임지겠다는 ‘유다’의 약속으로 형제들은 다시 ‘요셉’을 만나러 이집트로 갑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대상으로 ‘테스트’합니다. 곡식을 담으러 가져온 모든 자루에는 ‘곡식’을 넣되, 나머지 한 자루에는 ‘은잔’을 넣게 합니다. 그 한 자루는 바로 막내 ‘베냐민’의 자루였습니다. 요셉은 계획적으로 형제들을 뒤쫓아갔고, 범인으로 지목된 ‘베냐민’을 자신의 종으로 데려가려 합니다. 그런데 그때, ‘유다’가 ‘베냐민’ 대신 종이 되겠다고 나서자 ‘요셉’은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못한 채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게 됩니다. 

요셉의 두 가지 면모

오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요셉의 두 가지 면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요셉은 누군가의 꿈을 주의 깊게 듣고 해석할 줄 알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가진 특별한 재능이자 재주입니다. 이 재주가 요셉에게 복이 되어 나라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능력을 잘 발휘한 사람이었고 그 능력을 억압하지 않고 잘 활용한 사람이었습니다. 

① 여러분께서는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인지하고 있나요? 보잘것없는 것이어도 상관없습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요셉이 가진 둘째 면모는 요셉은 형들을 만났을 때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는 권력자의 모습을 내려놓고 형들을 대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그는 울면서 형들에게 입을 맞췄습니다. 자신을 더 이상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형들과 하나가 되게 됩니다. 이제야 비로소 그에게도 관계를 맺을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② 여러분께서는 평소 자신의 감정을 잘 알아차리며 지내시는지요? 감정을 잘 표현하기도 하십니까? 

어쨌든 요셉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정착하게 됩니다. 요셉 한 사람의 운명이 민족 전체의 미래를 결정했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성경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with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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