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Salon

에세이 442

[에세이] 자유로운 존재, 인간

청소년 시절 교회에서 문학의 밤을 할 때가 생각난다. 지금도 기억하는 극 중 대사 하나가 있는데 니체의 "신은 죽었다"가 바로 그것이다. 친구의 대사를 듣고 불안감에 사로 잡힌 나는 그 때부터 니체를 내 인생의 경계대상 1호로 삼았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직 니체의 책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그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책을 곁눈질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일행들은 하나같이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그려냈다. 동기에게 니체 이름을 꺼냈더니 이름만 듣고서도 기독교에서 아주 불온한 인물이라는 반응을 했다. 친구의 말도 맞는게 니체와 그 일행들이 하는 말은 기독교의 교리와 많은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일으켜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게 사실일까, 궁금해 졌다.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인식하는 그들과 성서가 ..

Essay 2017.01.23

[에세이] 목사, 참 사람이 되고 싶다

​ 목사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증명될까. 갑자기 생각이 거기에 머물렀다. 현재 몸 담고 있는 교단의 정년 은퇴는 70세이다. 은퇴한 목사라. 70세가 되어 은퇴를 하고 나면 그 때부턴 목사가 아니란 말일까. 그 때부턴 무엇으로 존재가 증명될까. 궁금해졌다. 몇 년 동안, 교회 안과 밖의 경계선을 걷고 있어 그런지 목사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끊임없이 따라 다닌다. 잠시 생각해 본다. 무엇이 먼저일까. 목사로의 '나'가 먼저일까, '나'로서의 목사가 먼저일까. 아님 이런 생각 자체가 조삼모사일 뿐인걸까. 나름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들 가운데 참 좋아하는 40대, 50대, 60대 목사님들이 계신다. 그분들은 적어도 후배의 질문에 뻔한 답을 내려주시지 않는다. 오히려 몇 가지의 질문 거리를 더 안겨주신다. 그분들..

Essay 2017.01.05

[에세이] 광장의 조증, 삶의 울증

"우리는 광장의 조증과 삶의 울증을 반복하고 있다." 이 말을 전혀 다른 자리에서 반복해 들었다. 한번은 청파교회 주일설교를 통해서였고 다른 한번은 팟캐스트 공개방송에서였다. 김목사님께서 설교 중 인용한 이 글귀가 종일 머릿속에 맴돌고 있던 터라 공개방송에서 은수미 전의원이 무심코 내뱉은 이 말을 그냥 흘려 넘길 수 없었다. 위 글귀의 전문 중 일부는 아래와 같다. "우리는 광장의 조증과 삶의 울증을 반복하고 있다. 삶의 울증이 심각할수록 현장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광장의 조증을 갈망한다. 삶의 울증과 광장의 조증 사이의 간격이 넓을수록 광장을 대신하는 정치의 공간에서 대중의 인기를 끄는 자는 두테르테나 트럼프 같은 정치인이다. 그들은 마치 콜로세움의 검투사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 사냥과 검투의 스펙터..

Essay 2016.12.29

[에세이] 청춘

청춘의 한 문장을 남겨볼까 한다, 조금은 서글프지만 그래도 희망적인. 소설가 김연수 씨는 에서 '청춘'을 일러 이렇게 표현했다. "인생의 정거장 같은 나이. 늘 누군가를 새로 만나고 또 떠나보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는 나이. 옛 가족은 떠났으나 새 가족은 이루지 못한 나이. 그 누구와도 가족처럼 지낼 수 있으나 다음 날이면 남남처럼 헤어질 수 있는 나이. 그래서인지 우리는 금방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친해질 수 있었다." 몇 해 전, 청년들을 대표한 기도 자리에서 이 글귀에 마음을 담아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12월이 지닌 양면성 때문이었을까, 성탄의 절기에 이 글귀의 부활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12월은 정신을 집중하며 지내려고 무지 애쓰는 아주 골치 아픈 달이다. 12월의 생일과 크리스마스, ..

Essay 2016.12.24

[에세이]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책을 읽다가 어떤 문장이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아 읽던 책을 무릎에 덮어두고 먼 산을 바라본다. 책을 잘 읽었다는 판단에는 여러 기준이 있을 테지만, 한 작가는 그 기준 중 하나가 한두 줄의 문장이 꼭 본인을 두고 하는 말인 것만 같아 더 이상 책장을 넘길 수 없는 순간이라는 말을 기억한다. 샘솟는 뜨거움과 마주한 나는 그저 먼 산을 바라보거나 한 줌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낄 뿐이다. 그 순간 나는 살아있는 하나의 불꽃이 된다. 아주 오래된 친구와 다시 만났다. 헤르만 헤세, 그는 다수의 책을 남긴 채 오래 전 떠났지만 여전히 지금의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그는 을 통해 한 호흡으로 두 가지의 음성을 전한다. 그 중 하나는 우리 안에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Essay 2016.12.21

[에세이] 광장을 외면하지 못하는 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어도, 웃으며 동료들과 수다를 떨고 있어도, 책을 읽고 있어도, 다음 날 이른 아침 스케줄 부담으로 발걸음을 집으로 향하고 있어도 불편한 날이 있다. 그런 날이 있다. 오늘은 저녁 늦게까지 빠듯할 일정 때문인지 몰라도 광화문 광장을 잊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날도 추운데다 토요일 저녁을 집에서 편히 쉬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애써 광장에 함께 나갈 동무를 찾지도 않았고 불현듯 찾아온 감기를 핑계삼아 홈보이가 되고도 싶었다. 탄핵 가결이라는 큰 산 하나를 넘은 안도감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계획대로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으로 향하는데 불편한 마음을 다룰 길이 없다. 해가 지기 시작한 그 때부터 어떤 생각들이 마음을 계속해서 찔렀다. 아마 이런 종류의 생각들이었으리라. ..

Essay 2016.12.11

[에세이] 신은 낙원에 머물고 있지 않다

추수감사절이 지나고 몇 주가 흘렀다. 적어도 감사의 표현은 사골처럼 우러날 줄 알아야 그 말의 본질이 흐려지지 않을 텐데 교회 내 감사의 자동판매기식 요구에 우리의 내면은 자주 사골의 앙상한 뼈만 드러내 왔다. 가톨릭 일꾼 금요 세미나에서 엘리자베스 A. 존슨의 책 를 중심으로 강의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첫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며 아버지께 전화 한 통을 드린다. 간단한 안부를 묻고 무얼 하고 계시냐는 물음에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뉴스를 보신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너도 내일 데모(집회)에 나가냐고 묻기에 3차 집회부터 꾸준히 나가고 있고 내일도 당연히 나갈 거라고 말씀 드렸다. 순간 “어서 끌어 내려야죠.”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툭 튀어 나왔고, 이 말을 들은 아버지께서는 그런다고 그 사..

Essay 2016.12.03

[에세이] 잘 늙는다는 건 뭘까

광화문 촛불 집회 참석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밤 12시가 조금 덜 된 시간이다. 할머님은 피곤하셨는지 불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어 계셨다. 조용히 불을 꺼 드리고 내 방에 들어와 보니 책상 위 양말 두 켤레가 놓여 있었다.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추운 겨울 손자 따뜻하게 보내라고 예쁜 겨울 양말을 얻어 오셨나보다. 할머니께서는 오래 전부터 종편 방송 중 TV조선을 즐겨 보셨고 무엇보다 박근혜 대통령의 과거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그녀를 감싸주는 말들을 자주 하곤 하셨다. 이번 최순실 게이트 사건이 터진 후 JTBC는 물론 TV조선도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관계를 앞장서 보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요즘 일과를 마치거나 촛불 집회 참석 이후 집에 들어와 할머니를 마주할 때면 왠지 모를 미안함과 안타까운 마음에..

Essay 2016.11.21

[에세이] 혁명의 순간, 그 다음날

만나는 사람과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를 떠나보내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이 더 힘겨워졌다. 그래서 그 사람을 떠나보내려 한다. 첫 연애, 헤어지고 나서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몰라 모든 당혹감을 끌어안느라 지독한 어둠을 경험한다. 미안함, 후회, 자책, 변명들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다시 여러 번의 인연을 만나고 헤어짐을 경험한다. 이제 이별 후를 조금은 알듯하여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다. 상실의 슬픔을 애도하고, 아픔을 직면하고, 또 견뎌낸다. 끝 모를 시간의 반복이다. 사랑은 떠나가도 삶은 계속될 것이기에 다시 힘을 내어 본다. 이별 후의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 무엇으로 그 삶을 채울 수 있을까? 다음 세상을 닳아버린 몽당연필로 ..

Essay 2016.11.10

[에세이] 글을 쓴다는 것

누군가 모든 사진에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일단 순간을 사진에 담게 되면 순간은 영원이 되고 또 하나의 의미가 된다. 글을 쓰는 행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떠올랐다 금세 사라지는 생각을 붙잡아 기록에 남긴다는 것은 그 생각이 영원이 되는 것이자 새로운 의미가 된다는 것일 테다. 이러한 점에서 사진찍기와 글쓰기는 닮은 구석이 있다. 어제 한 무리와 설교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무리에 계신 한 분을 포함해 개인적으로 아는 몇몇의 지인들은 설교문의 개요만 잡고 중심내용은 현장에서 이야기로 풀어낸다고 했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글쓰기(설교문)는 삶을 대하는 태도이자 자기 수행의 과정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가능하면 설교의 기승전결을 원고에 모두 담으려 노력한다. 물론 대중 앞..

Essay 2016.11.07